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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곰 Aug 22. 2019

잔망스런 이야기 13

쥐엄나무

동네 입구에 아름드리 쥐엄나무가 있었다. 쥐엄나무 열매는 덜 여문 콩깍지처럼 생겼는데, 얇은 완두콩 같던 것이 다 익으면 진한 갈색이 되어, 끈적끈적한 조청 같은 단물 속에 작은 열매들이 박혀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친구들이랑 학교 파하고 오는 길이면 꼭 그 쥐엄나무 아래서 쉬면서 단물을 손가락에 묻혀, 붙였다 뗐다하며 거미줄보다 가늘게 늘어지는 얇은 실들을 보곤 했다. 쥐엄나무에 기대서 위를 올려다보면 순식간에 딴 세상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좋았다. 햇살이 좋은 날은 좋은 날대로, 비가 오는 날은 오는 날 대로, 단풍이 진하면 진한대로, 눈이 쌓여있으면 눈 때문에 더...     




잠깐이긴 했지만, 우리 집엔 일꾼 아저씨가 있었다. 아직 농사가 기계화가 많이 안 됐던 시절이라, 가을이 끝나면 나락(쌀) 값으로 쳐서 얼마를 받기로 약속을 하고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숙식은 제공이다. 오빠 언니들 어렸을 땐, 다른 아저씨가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00 양반’이다. 엄마가 그러는데, 00 양반은 부인이 도망가 버리는 통에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됐고,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있던 집 사람들하고 된통 싸우고는 나왔다고 했다. 아빠가 00 양반을 우리 집에 있게 한 이유는.. 경우가 바르다는 거였다. 절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안 하고,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 필요한 건 ‘성실한 일꾼 아저씨’였는데 말이다.     


'00 양반'은 일단 외모가.. ‘피골상접’이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에 나오는, 걸어 다니는 해골에 오뉴월 햇볕에 까맣게 탄 가죽을 탈탈 털어서 씌워주면 딱, 00 양반이겠다고... 처음 본 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내가 본 남자들 중 가장 마르고, 가장 까맣고, 가장 눈이 튀어나온 그래서 그 눈의 흰자위와 그 안의 충혈된 혈관이 너무도 도드라져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랑 얘기하면서도 뒷짐을 지고 서서는 대대 하게 굴길래 ‘아, 이 아저씨는 일을 제대로 하겠구나’ 했더니..    

일단, 자신은 술기운으로 일을 한다면서 수시로 술을 마셨다. 밭이나 논에서 일을 하다가도 술 한 잔 해야 쓰겠다면서 가 버렸다. 


“ 느그 집, 00 양반 아니냐?”    


학교에서 오는 길에, 쥐엄나무 아래서 개처럼 등을 말고 자고 있는 취한 00 양반을 볼 때면 울화통이 치밀고 창피했다. 일꾼인지, 상전인지.... 00양반 일어나라고 깨우면 막내야, 하면서 세상 환하게 웃었다. 우리 집에 한 마리 있던 젖염소는 자기 우리 뒤에 있던 작은 대나무 숲 덕분에 살아남았다. 00 양반 믿고 소라도 키웠으면 분명, 아사했을 것이다. 술값으로 수시로 엄마에게 돈을 가져가서 가을에 받기로 한 돈도 남은 게 없기 일쑤였다.    




그때 살던 우리 집은 옛날 집이라 엄청 낡았지만 집터는 무지 넓었다. 마당 왼쪽에는 햇볕이 잘 드는 약간 높은 언덕이 있어서 그곳에 가축우리가 있고, 그 뒤로 대나무 숲, 그 옆으로는 엄마가 토란을 키우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집 뒤까지 쭉 이어지는 그 언덕에 오동나무랑 키 큰 고목인 밤나무와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처음에 누가 매 준 건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언덕에서 내려오는 부분에 서 있던 감나무에 나무그네가 있었다. 감나무가 키가 크기도 했지만, 집 뒤가 바로 산이라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을 등 뒤로 맞으며 그네 타는 게 좋았다.


문제의 그날도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저만치 대각선으로 보이는 대나무 숲에 00 양반이 막대를 들고 서 있었다. 막대로 뭘 하는 것 같더니 한 손으로 까만 줄 같은 것을 들어 올렸다. 근데 줄이 막.... 움직였다. 뱀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놀랐는데, 순식간에 까만 뱀이 도라지처럼 하얀 뱀이 됐다. 그대로 그네에서 떨어져 언덕 아래로 굴렀다. 땅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나를 엄마가 봤다.     


구르는 나를 보고 00 양반도 놀라 달려왔고, 난 소리를 지르며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00 양반은 끝까지 대나무 숲에 있던 뱀을 잡아서 집 밖으로 내 보낸 것이지, 그런 짓은 안 했다고 했다. 그런 저런 일들로 엄마도 점점 00 양반을 꺼리게 됐고, 그 해 가을이 끝나고 우리 집에서 나갔다.  



   

언젠가 엄마가 '00 양반'이 죽었다고 했다. 아랫동네 어떤 집에 있었는데, 그 집 사람들이 장례도 안 치러주고, 00 양반을 그 딸한테 그냥 보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우리 집에 있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그러라고 할 걸 그랬다며....


쥐엄나무는 동네 앞길이 넓게 포장되면서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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