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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6. 2017

나의 좋은 날

그녀를 잊어가는 날들이 저에게 좋은 날이 아니에요

  정말 하나, 둘, 셋하면 잊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왜 노랫말있잖아요. 괜찮아, 하나 둘 셋 하면 잊어, 슬픈 기억 모두 지워- 라는. 공항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누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더군요.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어쩐지 가사가 슬퍼서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 노래를 믿고 싶었어요.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도통 받아들일 수 없는 순간이었죠.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공항에 나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것도 아니면 체크인을 포기하는, 아니 어쩌면 보딩하지 않고 돌아오는 그런 신파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미 그 전에 알고 있는 것도 너무 많았죠. 예매된 비행기 티켓, 계약금을 보낸 차와 집 따위요.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너무 큰 금액이었죠. 그러면서도 그깟 돈 때문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관계를 두고 나를 떠나갈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나 곱씹어 보게 되더군요.


  하지만 공항에서 나를 마주칠까봐 일찌감치 체크인을 하고 수속을 밟아버린 그 사람이 정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맞나 싶어졌어요. 지독하게 싸웠어요. 지금 꼭 가야하느냐고 물었고, 삼 년만 기다려달라는 대답이 돌아왔죠. 어이가 없었어요. 시간도 공간도 다른 곳에서 연인 사이가 어떻게 유지되냐고 묻던 건 그녀였거든요. 제가 입대를 하자마자 헤어지자고 했어요. 기다릴 수 없대요. 기약은 있지만 그것이 내일도 다음 주도 다음 달도 아닌 내후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대요. 그렇게 헤어지고 간간이 그녀의 소식을 들었어요. 선배과 연애를 한다는 이야기, 동아리 후배와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 강사와 썸을 탄다는 이야기- 그 많은 이야기 중 진짜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그녀는 시간과 공간이 맞닿으면 연애를 시작했으니 모두 진실일지도 모르죠.


  참 우습게도 제가 제대하던 날 그녀가 찾아왔어요. 선배는 취업을 해서 더 이상 학교에 없고, 후배는 군대에 갔고, 강사는 다른 학교 교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무렵이었죠. 저는 그래도 그녀가 좋았어요. 그 후에도 여러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어요. 헤어진 사이에 그녀는 다른 사람을 만났고 저는 기다렸죠. 돌아올 거란 걸 아니까. 늘 돌아왔어요, 저에게로. 그래서 지금도 알고 있어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연애를 하고 사랑을 나누더라도 그녀 말대로 3년 뒤에는 저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런데요, 이상해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녀가 돌아오는 그날이 저에게 좋은 날이 아닐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어쩌면 앞으로도 저는 그녀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녀를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사랑했듯 그녀를 긴 시간을 보내며 잊겠죠. 하지만 그녀를 사랑한 날들이, 그녀를 잊어가는 날들이 저에게 좋은 날이 아니에요.


  어쩌면 제게 좋은 날은 이 모든 감정을 깨끗하게 지워낸 어느 계절일 거예요. 둘, 셋-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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