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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24. 2018

소나기: 비의 계절을 지나는

소나기를 제일 좋아해요. 불안정해서 내리는 거잖아요.

  맨발의 여자가 한 손에 샌들을 든 채 도로를 건너는 사진을 마지막으로 갤러리에서 나왔다. 딱히 인상적인 사진이 있던 것도 유명한 작가가 참여한 전시도 아니었다. 입장할 때 받았던 삼단 리플릿은 이미 출구 쪽에 여러 장 쌓여있었다. 전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 두고 간 것이겠지만 어쩐지 손에 들린 리플릿을 그 위에 한 장 더하는 일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리플릿을 가방 사이로 밀어넣고 엉망으로 놓여있는 리플릿을 한데 모아 모서리를 맞춰 정리해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불쑥 끼어들어 리플릿 뭉치를 집어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버리고 가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말간 얼굴의 여자가 서있었다. 쉽게 잊혀질 것 같은 얼굴이다. 별다른 특색도 표정도 없는.

  “버린 건 아닐 거예요.”

  나의 짧은 대답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갤러리 관계자인가,하는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말했다.

  “점심 같이 할래요?”

  “네?”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플릿을 정리하는 모습에 나를 자신과 같은 전시관계자로 오해한 것 같았지만 한 편으로는 딱히 그 오해를 당장 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간 얼굴로 당황하는 모습이 궁금해져 그녀에게 물었다.

  “뭐 먹을까요?”

  그녀가 길 건너의 칼국수 가게를 가리켰다. 색이 제법 바란 녹색 간판 위에 흰 페인트로 쓰여있던 칼국수라는 세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이 근처에서 제법 오래된 맛집인가 싶었지만 그녀와 내가 주문한 손칼국수는 간이 맞지 않았고, 김치마저 메뉴판에는 중국산이라고 써있었다. 너털웃음이 났다. 

  “엄청 맛집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를 유심히 본 후에야, 나중에 한 번쯤 떠올렸을 때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기억해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과 도드라지지 않은 광대와 턱, 조금 지워진 산호색 계열의 볼터치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더 먹고 일어나요. 너무 많이 남기면 미안하잖아요.”

  그녀가 국물을 떠먹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맛없는 칼국수 한 그릇을 모두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처마 아래 섰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카운터에서 받아온 박하사탕 하나를 건네줬다. 김치에 잔뜩 들어있던 생강 맛이 겨우 가시는 기분이었다. 

  “소나기네요.”

  대꾸 없이 그녀는 가만히 내리는 비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의 낡은 갤러리로 향해있었다. 붉은 벽돌의 갤러리는 비에 젖어 더 진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비로소 벽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명의 전시작가 중 제법 크게 인쇄된 그녀의 사진은 지금보다 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비 오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여름에 내리는 소나기를 제일 좋아해요. 불안정해서 내리는 거잖아요.”

  그녀가 아까처럼 소곤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리플릿을 한 장 건네며 말했다.

  “이거라도 쓰실래요?”

  리플릿으로 머리를 가리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쩐지 받아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빗방울 몇 개가 리플릿에 작은 물방울무늬를 냈다. 그녀에게 무언가 더 말을 해야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에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날 리 없었다.

  “밥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요. 그냥 궁금했어요. 내 사진을 보러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먼저 갈게요.”

  그녀가 빗속으로 총총총 뛰어들었다. 마지막에 본 사진 속의 여자와 그녀가 닮았다는 생각이 살짝 스쳤다. 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쳤다. 소나기였다. 갤러리의 현수막을 다시 올려다보았지만 아주 낯선 얼굴을 한 여자가 금세 갠 하늘 응시하고 있을 뿐 내가 보았던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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