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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25. 2018

바깥, 어떤 불면의 시간에

가만히 생각하니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달 초부터였던 것 같아요. 주중에 내내 야근을 한 탓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본가에는 대체 언제 내려올 거냐는 부모님의 성화에 짜증도 났어요. 기온이 오를수록 입맛도 없어졌어요. 점심에 밥 한 술 제대로 못 뜨는 저에게 삼계탕이라도 사주겠다는 동료조차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은 체한 것처럼 불편했어요. 일에 집중을 아무리 하려해도 무기력하게 느껴지면서 도통 속도가 나지 않았고, 사실 그래서 야근을 내내 한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이렇게 잠을 못 이룬 건 처음이에요.

  잠이 오지 않는다고 뭘 하는 것보다 차라리 눈이라도 감고 있으면 더 나을 것 같단 생각에 침대에 아무리 누워있어도 잠이 오질 않았죠. 그래서 낮에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고, 카페인이 들어있는 녹차조차 마시지 않았어요. 자기 전에 찬물이 아니라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게 좋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도 했어요. 침실 온도를 이십이 도에서 이십삼 도로 맞추는 게 좋다고 해서 맞춰놨을 정도였죠. 하지만 계속 잠을 잘 수 없었어요. 

  결국 이건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르렀어요.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달 초에 헤어진 애인 때문일까- 하고 말이에요.

  프로젝트는 일정이 조금 빡빡했지만 순탄하게 진행 중이었고, 애인은 이런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나인데 내가 이렇게 잠도 못 이룰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니 믿을 수 없었어요. 어쨌든 혹시 애인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다른 부분에서는 제 불면의 원인을 찾기 어려웠으니까요.

  그래서 말이에요, 저는 명함첩을 꺼내서 명함을 찾기 시작했어요. 헤어지자마자 휴대전화 번호를 지워버렸는데 그 사람 번호를 제가 전혀 외우지 못했거든요. 중복되는 숫자 없이 참 어려운 번호였던 것만 기억이 날 뿐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까요. 재작년인가, 무슨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고 그때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만나게 되었거든요. 명함이 여기저기 섞여있어서 그런지 쉽게 찾지도 못했어요. 차라리 그 사람 회사 홈페이지에서 직통번호를 찾아서 연락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을 만큼 명함을 찾지 못해서 답답했어요. 하지만 결국 찾아내서 전화를 걸었는데 결번이더라고요. 저와 만나면서 한 번인가 두 번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던 일이 생각났어요. 그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어요. 뭐랄까, 사랑하던 두 사람이 헤어진 후에 이렇게까지 단절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두려웠던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하니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써내려가기로 했어요.

  이름 김석진, 나이 서른두 살, 생일 십이월 사일, 취미 낚시 그렇게 써내려가다가 금세 막히더라고요. 좋아하는 음식은 짬뽕? 봉골레 파스타를 더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그래, 다른 걸 먼저 생각해보자. 좋아하는 색은 밤하늘처럼 짙은 색을 좋아했지. 그래서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 그 사람은 여름은 온종일 하늘만 보고 있어도 즐겁다고 했었어요. 여름엔 하늘의 변화가 몹시 예뻐서 지루할 틈이 전혀 없다고 했죠. 그 순간 분명히 깨달았어요. 

  계속된 불면의 원인이 열대야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 열대야는 바깥부터 천천히 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도요. 에어컨으로 온도를 낮춰도 소용이 없었어요. 제게 머무는 열대의 시작과 끝은 그 사람이었으니까요. 우리에게 이별의 이유 같은 건 사실 없었어요. 그날은 너무 더웠고, 휴가를 취소해야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침까지만해도 헤어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저녁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어요.

  “우리 그만 만나자.”

라고요. 왜냐는 그의 물음에 저는 툭 던지듯 대답했죠.

  “지겨워서.”

  지겹다는 건 연애나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장마 끝에 길게 찾아온 열대야가 지겨웠죠.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어요. 봄을 타서 설레고, 가을을 타서 외롭다는 그런 뻔하고 흔한 말이 우리에게는 너무 슬픈 결말을 가져왔다는 사실을요.  

  왜 그런 말하잖아요. 뜨겁게 사랑한다거나 사랑이 식었다는 말이요. 그 사랑의 온도가 저는 딱 이십오 도였나봐요. 그래서 이렇게 잠 못 이루는 열대야가 제게 계속되나 봐요. 다음 달이 되면 괜찮아지겠죠. 가을의 이십오 도와 여름의 이십오 도는 다른 온도잖아요.

  이 여름이, 부디 빨리 지나가면 좋겠어요. 이 열대야가 끝나면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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