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서는 비 냄새가 났고, 소년에게선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소년은 소녀의 걸음에서 운율감을 느낀다. 소녀가 걷는 속도는 대개 느리다. 동네의 고양이를 보면 살금살금, 오후 3시에 크로와상이 나오는 제과점 앞에서는 머뭇거리고,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모인 놀이터 앞에서만 재빠르다.
그날은 비오는 날이었다. 소년은 물방울무늬 비옷을 입고 우산을 말아 쥐었다. 소년이 서있는 폐업한 서점 앞으로 소녀가 지나갈 것이다. 물웅덩이를 만날 때마다 두 발로 ‘퐁당’하면서. 서점 앞에 고인 웅덩이를 보면서 소년은 속으로 몇 번씩 연습했다.
- 안녕?
- 이 우산 쓰고 가.
- 안녕?
- 우산 빌려줄까?
- 안녕?
- 나는 비옷이 있어서 괜찮아.
소년이 다시 ‘안녕?’이라고 속으로 다시 뇌였을 때였다.
- 안녕?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흠뻑 젖은 소녀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산을 내밀었다. 소녀가 우산을 받아 펼치자 팡-하고 무덤같이 어둡고 좁지만 비는 맞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 소나기 속에 생겨났다.
- 같이 쓸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우산 속으로 들어갔고, 소녀가 소년의 왼쪽으로 한발자국 가까이 섰다. 소녀에게서는 비 냄새가 났고, 소년에게선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소녀의 걸음에 맞춰 소년도 걷기 시작했다.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얼룩무늬 고양이를 지날 때는 살금살금, 소녀의 키만 한 바게트가 구워져나온 제과점 앞에서는 머뭇머뭇 그리고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진 놀이터 앞에서 소녀가 멈추었다. 소년은 그때 알 수 있었다. 놀이터에 생긴 물웅덩이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 대신 빗소리로 가득 찬 놀이터 그리고 우산을 꽉 쥔 소녀의 손.
- 숨바꼭질할래?
소녀가 물었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터 앞의 물에서 ‘퐁당’. 소녀가 물웅덩이로 뛰었고 고여 있던 빗방울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려는 듯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소년의 물방울무늬 비옷 위에도 빗방울이 가득 찍혔다 흘러내렸다. 비옷 끝에서 똑똑-하고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년은 기억한다. 비 오던 날, 물웅덩이로 뛰어들던 소녀가 만들어내던 소리들과 소녀의 곁에 머물던 빗방울의 속도, 소녀가 걸을 때마다 소년의 비옷에 스칠 때 생기던 작은 마찰 그리고 퐁당하고 빗속으로 사라진 소녀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 고양이들과 제과점 주인과 놀이터의 아이들은 소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소년은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의 옆면에서 소녀를 발견하고 엄마에게 소녀가 소나기 오던 여름 날 빗속에서 사라졌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년의 엄마는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가 3년 전 실종된 아이라고 소년을 위로할 뿐이었다.
오래된 도로는 정비되고, 놀이터에는 모래대신 우레탄이 깔렸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기던 때가 있었다. 빗줄기 속을 헤치고 소녀가 걸어나오지 않으니 혹시 물웅덩이에서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이면 가만히 생각한다. 소녀의 긴 숨바꼭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