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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1. 2017

당신과 나 사이에 내리는 눈에 대하여

노력이 전혀 필요 없는 연애는 서로를 전혀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느닷없이 이토록 다정한 밤이 오는 구나, 싶어 이상하리만치 설레버렸다. 사실 어쩌면 우리에게 그저 다시,라는 말은 우리가 헤어지고 만나는 것을 견딜 수 있게하는 수 많은 핑계 중에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금 전 너는 나에게 막연했던 미래를 또렷하게 만드는 핑계를 댈 수 있게 해버렸다.


  헤어진 연인의 재회를 달갑게 생각한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다. 피치 못할 이유로 헤어지더라도 서로를 그리워하다 다른 연인을 만나고 각기 다른 추억을 만들다 먼 훗날에야 아직도 당신을 사랑한다며 조우하는 신파는 유치했고, 헤어져서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서로를 애타게 앓다가 재회하는 모습 또한 헤어진 이유를 각성 시켜주고 싶을 만큼 못마땅했다. 헤어진 후에 친구사이, 선후배 사이, 오빠동생 사이 등으로 남는 관계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관계를 볼 때는 나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손만 잡고 연애한 거 아니잖아? 물고 빨고 하던 사이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어?"


  더 이상 애정이 전과 같지 않아진 사이라해도 달뜬 밤을 지새웠던 사이가 쿨-하게 커피를 마시며 요즘 만나는 사람을 소개해주는 일은 비겁하다. 일말의 감정이 없다고 해도 과거의 애인을 현재의 친구로 삼는 일은 현재의 연인에게 예의가 아니다. 한 때 쉴새 없이 입을 맞추던, 어떤 체위를 좋아하는 지 정확히 알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걸으며 서로의 가장 아픈 이야기를 위로했던 연인이 더 이상 연인이 아니기 되면 아쉽지만 모든 미련을 버리고 관계를 매듭짓는 것이 옳다. 그렇게 믿어왔다.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너를 그리워하지도 애틋해하지도 않았다. 너는 수많은 연인 중 하나였고, 그 중에서도 딱히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지나치게 나와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연인이 좋아하는 음식점에 간다거나, 연인을 통해 새로운 취미를 갖는 일은 너를 만나면서부터 하지 않게 되었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고, 나의 취미는 너의 취미였다. 처음에는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는 모습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너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력이 전혀 필요 없는 연애는 서로를 전혀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나는 로맨스 영화와 스릴러 영화 중 무엇을 볼 지 가위바위보를 짜는 연인을, 오늘은 제발 내가 먹고 싶은 오일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고 조르는 연애를 선택했다. 그렇게 아주 쉽게 너는 나의 삶의 반경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옛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유를 핑계 삼아 너는 나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홍아, 여기 첫눈 내린다."


  이상하게 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잃어버리고 아주 잠시 상심했었던 무언가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너에게 대답한다.


  "왜 이제야 첫눈이 내렸담? 덕분에 네가 이제야 내게 전활 걸었잖아."


  창 너머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네가 나에게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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