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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2. 2017

네가 하는 로맨스

내가 너에게 고백하지 못한 수많은 시간처럼

  처음에는 너의 연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어딘가 어두웠던 너의 지나온 연애들 때문이었다. 너는 네가 좋으면 그게 전부인 연애를 했다. 네가 먼저 고백을 했고, 네가 먼저 키스를 했고, 네가 먼저 너의 집으로 상대를 초대했다. 너의 연인들은 너의 넘치는 애정을 달가워하다가도 결국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면 된다는 너를 만날 때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던 L, 너와 심하게 다툰 날에도 너에게 카드를 받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K, 만나기로 한 시간의 삼십 분 전에 피씨방에 가야한다며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리던 H- 내가 기억하는 너의 연인들은 그랬다. 너의 사랑은 당연했지만 그의 사랑은 담담했다.  


  너는 그때면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너의 눈에 어린 처연한 그림자를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인들과의 연애가 끝난 후에 너는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노라고, 정말 사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의 그 지리멸렬한 연애가 정말 지리멸렬해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나는 너의 연애를 이해할 수 없어진다. 너절한 아픔이라던가 지치는 슬픔이 깨끗하게 거둬져서 하마터면 처음부터 너의 연애가 그렇게 달콤한 것으로 오해할 뻔 했다.


  "좋아보여."


  나의 말에 너는 가만히 웃었다. 너의 앞에 놓인 찻잔에는 삼십 분이 넘도록 줄지 않은 홍차가 식어가고 있었다.


  "좋아보인다는 말 너에게 처음 듣는다."


  "정말이야. 그 사람이 잘 해주나봐."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슬퍼지는지 도통 알 수 없어진다. 이제 너를 위로하는 일도, 눈물 자국을 닦아주는 일도 없어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모든 바람이 잠을 자듯 조용한 밤이 거리마다 내려 앉고, 나는 마음이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너는 한 손으로 찻잔을 빙빙 돌리다 말한다.


  "잘해줘, 너처럼."


  절망을 씹어 먹으면 이런 맛이 날까. 나는 갑자기 입이 써서 참기 어려워진다. 정말이지 세상은 뜻대로 되는 것이 없고, 소원이나 바람은 그저 그 단어 속에서만 희망을 말한다. 내가 너에게 고백하지 못한 수많은 시간처럼, 네가 나를 그저 우두커니 바라보았던 어제들처럼.


  "다행이네."


  나의 말에 너는 식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너는 늘 네가 먼저라서 나는 차마 너에게 고백같은 걸 하지 못했다고, 네가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아서 네가 나를 애정의 범위 내에 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결국 나의 미련이 되었다고.


  네가 딱 한 번만 나에게 말해줬다면,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연애를 너와 내가 할 수 있었다면-하며 나는 또 너를 핑계삼아 삭막한 시간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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