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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5. 2017

너에게 하는 말

잘 지내냐는 물음에 대답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일 년만이었다. 정확하게 일 년은 아니었지만 그즈음 되었을 것이다. 12월에 접어들 무렵 헤어졌다는 기억과 12월 중순 다녀온 홍콩 여행 전이었으니 딱 이 무렵이다. 남자와 여자가 헤어진 때는.


  여자는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남자가 입고 있던 셔츠의 패턴과 왼쪽이 살짝 더 닳은 운동화까지 기억해냈다. 단순히 남자에 대한 기억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박물관에서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찍던 날 아침 버스가 오지 않아 친구들과 발을 동동 구르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박물관에 갔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탔던- 이미 오래전 노선과 버스 번호가 바뀐 그 버스의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여자는 모든 것을 잊지도 않고 기억하는 자신이 때때로 원망스러웠다. 이제는 아이 아빠가 된 첫사랑이었던 반장의 학번과 여자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짝꿍의 얼굴을 잊지 못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습관을 길렀다. 이를 테면, 기억에 남을 법한 모든 것에 대해 다른 생각과 기억을 끼워넣어 엉망으로 만들었다. 


  연애를 하면서는 기념일을 챙기지 않았다. 연애를 시작한 날을 날짜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로 기억했고, 연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리오올리오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안 음식으로 외워두는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 덕분에 여자는 헤어진 후에도 어느 노랫말들처럼 너와 걷던 거리, 너와 먹던 음식 따위를 떠올리 수 없게 되었다. 여자는 점점 모든 관점을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연애를 하면서 다투는 일이 많지 않았다. 상대의 상황과 변명을 모두 이해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을 이유로 여자는 헤어졌다.


  "너는 좀 다른 것 같아."


라고 했던 남자는 


  "너는 좀 평범할 수 없니?"


라며 헤어지자고 했다.


  그리고 어제, 여자는 남자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여자는 메시지를 확인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대답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망설이다 '네'라고 짧게 답을 보냈다. 망설이는 동안 여자는 여러가지를 생각했다. 재회라던가 재회라던가 재회에 대해서.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사귀기 이전처럼도, 사귈 때처럼도, 헤어진 다음처럼도 그 어떤 관계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자가 '네'라며 답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단순했다. 여자의 생일이었다. 헤어졌지만 축하 메시지 정도는 받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고, 기분 좋게까지는 아니라도 대꾸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참 짧은 대답이네. 보고싶어."


라는 메시지를 확인한 여자는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너는 항상 보고싶다는 말만하지. 그 말이 나를 보러 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아. 나를 보고싶다는 너에게 내가 와주길 바라는 거잖아. 넌 어떻게 변함없이 이기적일 수 있니? 그래서 우리가 헤어진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모르겠다면 제발 이번에 정확히 알아두면 좋겠어.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냐.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던 거지."


  여자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휴대폰을 껐다. 하고 싶은 말이 전해지는 일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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