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옥이네 2022년 11월호(VOL.65) 여는 글
어릴 적 영어를 잘하는 것은 공부에 큰 관심이 없는 또래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권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간혹 성적은 좋지 않아도 영어에 특출한 재능을 뽐내는 친구가 있기라도 하면, 교실 안에서의 위상이 재정립되기도 했으니까요.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웬만한 인터넷 번역기도 꽤 괜찮은 영어 실력을 뽐내고 있는 때이니 예전과는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향한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여전한가 봅니다. 영어유치원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국제화교육특구니, 영어교육도시니 하는 생소한 단어가 교육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요.
이 풍경을 보면 자연스레 우리 지역 결혼이주여성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온 그들 역시 (우리가 모르는) 꼬부랑말을 사용하는 건 같은데 어째서 그들의 말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도 다를까요.
옥이네 예순다섯 번째 이야기인 이번 11월호에는 옥천 이주여성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지역 이중언어 환경을 짚고 다른 지역의 이중언어 교육 활동을 담습니다. 지역 이주여성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가진 언어 능력을 지역사회에서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왔는데요. 이번에 옥이네가 다룬 이야기가 이런 고민의 실마리를 푸는 데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불어 아이를 기르는 부모님들께도 이번 이야기는 남다른 울림을 줄 듯합니다. 내 아이와의 온전한 소통, 모든 부모가 소원하는 것일 텐데요.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에 늘 마음을 쏟고 계실 분들이라면 특별히 더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제한된 지면에서 다 다룰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이주여성들이 낯선 땅에서 낯선 말로 자녀를 양육하며 겪어야 하는 막막함이 독자 여러분의 가슴에 먹먹함으로 가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그런 아픔과 슬픔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큰 동력이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9월 골목길 인문학 강연으로 초청했던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나의 눈이 아니라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힘, 그리하여 비로소 내 세상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 곧 교육이고 배움이라고요. 당장 우리 지역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의 말을 살리고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부터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배움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주여성의 말, 이주배경 가정의 이중언어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그 가정 뿐 아니라 나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 되겠지요.
대청댐 수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옥천 사람들이 만든 대청호 생태관광 이야기, 지역 장애인이 모여 자신의 권리를 외친 현장(피플퍼스트, 장애인인권 영화제), 오래도록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온 전복자(안남면 부녀회장), 이근복(구두가방종합병원) 선생님 이야기도 꼼꼼히 눈에 담아주세요. 너무나 익숙하게 여겨서 전혀 몰랐던 세상이 이들의 이야기 속에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본격적으로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 앞에서는 늘 설레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마음으로 겨울을 맞습니다.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지금 이 시기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청년 세대가 얼마나 좌절하고 있을지 더욱 상기해보려고 합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분노하는 11월을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