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노동
서랍에 저장해 뒀던 글도, 글을 쓸 소재도 바닥이 났다. 처음 한 달은 저장된 글이 꽤 있었기 때문에 간간히 업로드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서랍이 텅 비었다.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공간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건 아니다. 교수님이 매주 내주시는 여러 쪽글과 6월까지 완성해야 하는 논문이 두 편 그리고 인터뷰 기사가 있다. 이것 또한 의무는 아니지만, 글을 제출하지 않는다 해서 하늘이 두쪽 나지는 않지만, 학점이 나 대신 두쪽 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글쓰기는 언제부터인가 노동이 되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온갖 생각들과 개념들 그리고 정의를 간신히 붙잡아 놓고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다. 중간에 카톡이 오거나 잡념에 빠지면 애써 잡아놓은 것들이 몽땅 날아가버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채집해 덩어리로 묶어둔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이렇게 엮어도 저렇게 엮어도 영 모양이 안 산다. 전부 집어던지고 새로운 창을 켜 다시 시작하는 일도 다반사다.
문제는 많은 형체(사람이든 사물이든 쓰인 단어든)가 가시적으로 보여도 심란하다는 거다. 연남동에 위치한 '레이어드'가 딱 그랬다. SNS 맛집을 즐겨 찾는 편은 아니지만 큼지막한 케이크가 먹고 싶어 친구와 방문한 그곳은 사람 반 케이크 반이었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애플파이와 블루베리 파이를 계산하고 더 어수선한 2층으로 올라가 좁은 자리에 몸을 구겨 넣어 겨우 앉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이제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애플파이를 먹었다. 다닥다닥 앉아 애플파이를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누가 찍어줬더라면 정말 눈물 날 만큼 웃었을지도 모른다. 바삭하고 버터의 풍미가 진한 페이스츄리에 큼지막한 사과 조림은 이제까지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에서 먹었던 1000원짜리 애플파이와 확연히 달랐다. 홍차에 마셔도 어울리고 씁쓰름한 아메리카노와도 궁합이 잘 맞았다. 사람이 많은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음번엔 포장해서 연트럴 파크에 앉아 먹어야겠단 다짐을 했다.
어쨌든 시각적 심란함을 겪은 나에겐 애플파이란 보상이 주어졌다. 내적 심란함을 안겨준 논문은 나에게 무얼 해줄 수 있지? 생각하다 위염과 소화불량이 주어졌다는 게 떠올랐다. 전부 다 참고 이겨내면 3년 후엔 8000원짜리 애플파이 열개쯤은 고민도 없이 결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 믿는다.
브런치 활동 무급은 노동이다. 노동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勞動이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브런치는 어마어마한 보상(글을 쓰고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 제공은 보상이라 볼 수 있겠다)도, 나에게 힘든 시기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뭔가 두쪽 날 일도 없으니 잠시 생각을 툭툭 내려놓는 곳으로 사용하면 된다.
저장된 글이 없다는 건 지난날의 생각을 시원하게 털어 냈단 뜻이다. 앞으로 더 맛있는 밥을 먹고 관련된 일들을 조금씩 옮겨 적으면서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내놓기 민망한 날것의 글을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