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인 유부처럼 푹 익어버린 나날들
포근한 봄이 지나가고 눅눅한 여름이 돌아왔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잘 포장된 참외에서 달큰한 꿀 냄새가 새어 나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6월에 접어들면 왠지 모르게 지난 반년을 되돌아보게 된다. 제시간에 맞춰 수업을 듣고 부지런히 밥을 먹고 외출 시 필요한 마스크를 꼬박 챙겼다. 이상할 것도 없는 하루들이 모여 벌써 6월이란 게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노란 곰돌이의 말은 아주 틀리지 않았다. 다만 행복한 일이 생겨도 내가 이걸 누려도 될지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줘도 먹질 못하니, 삶의 무언가가 단단히 틀어진 느낌이다. 이럴 때면 머리를 죄 비워낼 단순 노동이 하고 싶어 진다. 단순 노동이라 하면 콩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반나절 동안 콩깍지와 알맹이를 분리하는 게 제일이다. 그 많은 콩을 다 먹어줄 사람이 생기는 날 반드시 도전해봐야겠다.
대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유부 조림을 하자. 조림 요리를 할 때 너무 많은 신경을 쓰면 조바심이 나 제대로 졸여지지 않지만 자주 들여다보지 않으면 금방 까맣게 타버린다. 그저 멍하니 있다가 간간히 뒤집어 주면 되니, 나름의 단순 노동이라 할 수 있겠다.
냉동실에 꽝꽝 얼려 뒀던 유부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기름기를 빼준다. 찬물에 헹군 뒤 말랑해진 유부를 살살 눌러 물기를 제거해주는데 이때 때 뜨거운 김을 제대로 빼주지 않으면 손을 데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동안 얕은 팬에 물을 150ml 넣고 다시마를 한 조각 넣는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다시마는 건져내고 가다랑어포를 한 움큼 넣어 준다. 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체에 걸러 다시 국물만 준비한다. 이 국물이 감칠맛을 내는 일본 요리의 기초이다. 여기에 간장과 설탕을 한 큰 술씩 넣어주고 청주 1.5큰술, 미림 반 큰 술을 넣고 설탕이 녹을 때까지 끓여준다. 부르르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인 뒤 물기를 뺀 유부를 넣고 졸인다.
우동을 끓이고 그 위에 이제 막 졸여진 따뜻한 유부를 얹어준다. 우동 한 그릇이 이렇게 정성을 쏟을 일이었던가 싶지만 유부를 베어 물면 입안에 가득 차오르는 육수의 감칠맛과 간장의 짭짤함이 그 수고로움을 잊게 한다. 유부에 국물이 잔뜩 배어 있어 따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다음엔 조금 더 욕심 내서 한 번에 유부 20장을 졸여 놨다가 두고두고 먹을까 생각도 들었다.
폭닥 폭닥 따끈한 유부 사이에 웅크리고 누워 아무것도 하기 싫다. 몸도 머리도 푹 익어버린 것만 같아. 마스크가 필요 없는 시골에 내려가 일주일 정도 맑은 공기를 잔뜩 마시고 싶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 지금이 여름의 도입부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음 유부 조림은 가을에 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로써 가을까지 힘을 내서 살아갈 작고 귀여운 이유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