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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슬욱 Feb 04. 2020

수 천 개의 바람개비 앞에서

홍콩의 도교사원, 체공묘

    설 다음날인 음력 1월 2일, 비비안은 아침부터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은 중국 전통에서 서로 싸우기 좋은 날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도교 사원인 체공묘(車公廟)에 가야 돼."

    "오늘이 싸우기 좋은 날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다투기 쉬운 날.” 중국 사람들은 설 다음날을 사람들끼리 쉽게 다툴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고, 함께 사원에 방문해. 각자 조용하게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거지. 우리도 오늘 거기 갈 거야."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들은 비비안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약간은 당황스러웠지만,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도교 사원인 체공묘에 방문한다고 하니 꽤 괜찮은 설 연휴 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사원에서 앞으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고 기원해야겠다.'

    집이 있는 마온산(馬鞍山)과 같은 구에 위치한 체공묘 역은 지하철(MTR)을 탄 뒤 약 15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한 동안 맑은 날만 계속되더니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다. 열차에서 내려 체공묘가 있는 방향의 출구로 나오니 이미 상당히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고사원 앞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으로 추측되는 줄도 있었다. 

    이게 혹시 입장 줄인가?” 내가 비비안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너무 줄이 길다 어떡하지?” 비비안이 내게 되물었다

    글쎄입장 줄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 정문 쪽으로 가서 상황을 봐보자.”

길게 늘어선 인파

    줄은 정문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입구에서 사원까지 걸어서 약 7~8분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긴 줄이었다. 기다릴까 말까 고민하다가정문 앞에 있는 한 경찰관에게 상황을 물어보기로 했다경찰은 현재 3개의 입구에서 출입통제가 이뤄지고 있고우리가 본 줄은 그중 하나라고 이야기하며, 다른 두 개의 입구에서는 생각보다 빨리 사원 안에 입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는데 내가 맞다고 대답하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등과 같은 짧은 한국말을 내게 선보였다나는 홍콩에서 한국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고 말한 뒤좋은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국어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비비안과 다른 입구를 찾아 나섰다

    두 번째 입구는 맞은편에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짧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결국우리는 마지막 입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후문 앞에는 상당히 많은 상점이 열려 있었고각 상점에는 설 도교 의식과 관련된 물품을 판매하고 있었다체공묘에서 가장 유명한 설 관련 물품은 바람개비”다. 모든 바람개비는 모양이 같았는데, 8개의 날이 있으며 손가락 한 개 길이 정도 되는 크기였다. 특이한 건, 바람개비를 낱개로 들고다니는 게 아니라 4개 이상의 바람개비를 막대기나 철사에 고정시켜 손으로 들고다닐 수 있도록 다양한 모양으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바람이 꽤 자주 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상점과 사람들 손에 들린 수천 개의 바람개비가 동시에 돌았다

    우리도 하나 살까하나 구매하고 싶어.” 비비안이 내게 말했다.

    그래 좋아하나씩 사보자.” 

   비비안은 나뭇가지에 나뭇잎이 달려있는 듯한 디자인의 바람개비를나는 새장 모양의 바람개비 장식을 구매했다비비안은 바람에 도는 바람개비를 보며 지난해 안 좋았던 운은 좋은 운으로 바뀌길 기원하고좋았던 운은 앞으로도 계속 좋게 흘러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나는 바람에 빙글빙글 도는 바람개비를 보며지난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건강 운을 바뀌길 기도했고비비안과의 애정 운을 앞으로도 계속 좋게 흘러가길 빌었다모든 상점을 지나친 뒤 후문 앞에 다다르자우리가 애타게 찾던 마지막 입구가 있었는데 과연 사람이 없고 줄도 매우 짧아 금방 사원으로 입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우리는 약 10분 정도 기다린 뒤 사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체공묘 후문과 구매한 바람개비

    사원 안은 출입 통제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사람이 매우 많아 발 디딜 틈 없었는데재미있는 건 사람이 많을수록 바람에 휘날리는 바람개비의 숫자도 많아져사원 내 분위기가 더 좋아진다는 사실이었다바람개비와 더불어체공묘의 주인인 재물의 신 체공의 거처가 있는 안채 앞마당에서도 특별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마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 손에는 크고 작은 향초가 몇 개씩 들려 있었고각각의 향초는 공기 중으로 연기를 끊임없이 뿜어대고 있었다연기는 공간을 가득 채워 하늘마저 가려 버렸는데연기가 어찌나 많았던지 화재가 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우리는 깜빡하고 집에서 향초를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 마당에서 연기를 피우지는 못 했다. 사원 입구 쪽에서 향초를 구입할 수는 있었으나수많은 인파를 비집고 되돌아가 향초를 구매할 자신은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사원 안에 몰린 인파
앞마당을 가득 메운 향초와 연기

    연기를 뚫고 안채로 들어가니 족히 1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체공의 상이 있었는데사람들은 이 거대한 상 앞에서 연신 고개를 내렸다 올리며 기도하고 있었다비비안도 세 번 정도 고개를 내렸다 올리며 체공에게 무언가를 기원했는데그 표정이 너무 진지하여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고 말았다이 곳 역시 인파로 가득 차 있어 발 한 걸음 옮기기가 어려웠지만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갖고 한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그들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한편굉장히 친숙하여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안채 뒤쪽에는 쇠로 된 바람개비가 비치되어 있었는데그 용도는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바람개비의 용도와 같았다특별한 것은 바람개비 옆에 있는 북이었다. 체공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 있도록 북을 두들겨 소리를 내, 그의 주위를 끄는 것이라고 한다. 비비안과 나는 차례로 쇠 바람개비를 돌리고 북을 쳐서 소리를 낸 뒤 사원을 빠져나왔다.

안채 안에 있었던 체공상 (좌), 쇠로 만든 바람개비 (우)

    사원 어땠어?” 비비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특별한 경험이었어너는 어땠어?” 내가 비비안에게 되물었다.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어. 사실지금 살고 있는 집에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 체공묘에 실제로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어.”

    그래하긴집 근처에 있는 장소는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고잘 안 가게 되는 경향이 있지. 나도 서울에 있을 때, 광화문이나 경복궁 같은 곳은 잘 안 찾아가게 되더라고. 그나저나, 아까 무슨 소원 빌었어?” 내가 궁금한 표정으로 비비안에게 물었다. 

    글쎄소원 빈 것을 말해주면 안 이루어지지 않나네가 먼저 말해봐.” 비비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 서로 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비비안의 진지한 표정에 또 한 번 피식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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