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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Dec 09. 2019

나는 니가 좋아할 만한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I am not making your favorites

친구가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로 이사를 한 날이었다. 짐을 부리고 우리는 다른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그중 한 명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 전까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더랬다. 같이 살게 된 멕시코 친구 A와 나, 그리고 한국인 친구 S 이렇게. S 역시 이 셰어하우스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가격이 다른 집에 비해 무척 저렴했고 집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와 A가 있어서 더 오고 싶어 했는데 빈 방이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방 이야기를 나누다가 A가 말했다. 사실 전에 같이 일했던 일본인 친구 M 역시 가격 때문에 이 집에 오고 싶어 했지만 빈방이 있었음에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바로 이해가 됐다. 왜냐하면 M 자신이 내게 들려주었던 일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처음 이 지역에 와서 살던 백패커스에서 거의 쫓겨났다고 했다. 본인이 생각할 때 자신은 방을 그리 더럽게 쓰는 편이 아닌데도 매니저가 방을 더럽게 쓴다는 이유로 그녀를 쫓겨냈다는 것이었다. 그때도 속으로 나는 그 매니저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데 그녀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맡은 라인은 유독, 예외 없이 혼돈이었으므로.      


우리는 각자 M과의 크고 작은 마찰을 가지고 있었다. M은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인사를 해도 무시했다. 그러길 반복해서 나 또한 그녀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자신이 먼저 와서 내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간혹 십분 정도 쉬는 시간을 늦게 가게 될 때가 있는데 M은 그럴 때면 불 같이 화를 냈고 그것이 자신만 겪은 부당한 일 인양 굴었다. 그 일로 S는 M과 다퉈 울기까지 했다고 했다. A는 M이 쫓겨나기 전 얼마간 같은 백패커, 같은 방에서 살았었는데 마침 일하는 파트와 시간까지 같아 오일 셰어를 하게 됐다. A의 차를 M이 탔고, 하루 왕복 요금을 책정해서 M이 A에게 한주에 자신이 탄만큼 주유비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이다. 출근 전 M은 A를 자주 기다리게 했다. 반면,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나가는 M은 A를 기다려야 했고 그때마다 A에게 서두르라며, 피곤하다며, 몇 분이 지났다며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한 번은 A가 다른 친구 한 명을 태우고 M을 데리러 갔는데, 자신에게 다른 친구를 태우고 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은 것에 화를 냈다고 했다. 그때 A는 폭발했고 M에게 경고한 것이다. M, 나는 니가 좋아할 만한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 차는 내 차고 나는 지금 너를 돕고 있는 거라고 주유비는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무언가를 같이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해나 어느 정도의 양보는 필요한 거라고. 나 역시도 너를 참아왔던 부분이 있었다고. 그 이후 둘은 화해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서로에 대한 작고 딱딱한 무엇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 아직 소녀티를 아주 벗지 못했을 때, 새로운 환경에 놓이고 관계의 영역이 확장됐을 때 많이들 이 콤플렉스를 지나게 되지 싶다. 나 역시 그랬고. 그때는 행동의 중심이 타인이었다. 그들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해서 거절을 거절했었다. 언제인지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이 콤플렉스가 사라졌다. 외부의 평가로부터 착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내 행동의 중심은 이제 거의 내가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고자 하는 선에서, 관계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라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달까. A가 말한 문장이 마음에 콕 들어와 박힌 건 아마도 스물여섯의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똑부러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니가 좋아할 만한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 하긴, 서른하나를 먹어서도 충동은 있으나 여전히 하지 못하는 말이지. 요즘 이십 대는 참 똑똑도 하다.     


어쨌든 M은 확실히 다른 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고. 우리 셋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으니 이 평판에 신빙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한다. 뭘 좀 물어봤다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그녀 덕에 민망했다던 사람도 있었고, 쉬는 시간을 바꿔줄 때 말로 하면 될 걸 팔이며 어깨를 탁탁탁 치는 행동에 참다 참다가 으름장을 놓은 사람도 있었다. M의 행동이나 리액션은 다른 이들보다 과장되어 있었다. 쉽게 친해지거나 대하기가 어려운 종류의 사람이었다. ‘내 페이스대로 사는 사람’의 안 좋은 예처럼 각인됐고, 각인은 그녀를 점점 더 그런 사람으로 정의했다. 초반에 그녀와 관계를 형성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친절했다. 그녀 또한 그랬다. 다만 호의를 가지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단계를 밟기 전에 그녀가 보여주는 일방적인 행동에 대부분 뒷걸음질 쳤을 뿐.   


언제든 균형이 중요하겠지. 모든 관계에 저자세를 유지할 필요도 너무 경직될 필요도 없을 테고,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방어적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해본다. 어차피 한번 사는데 내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하고 싶은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눈치 볼 거 없이 좀 살아보면 어떤가.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좀 맘대로 살아보면 어떨까. 사실 나는 M을 잘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를 잘 알기 전에 그녀가 보여준 태도와 다른 이들이 겪은 일련의 일화를 들으며 그녀를 판단하고 이미 거리감을 뒀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만든 거리의 간격을 보며 누가 먼저 다가올 것인지를 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관계 형성에 서툴다고 판단한 나는 우쭐해하며 다시 인사를 걸어온 그녀에게 ‘그래 아쉬우니 니가 먼저 다가오는구나’ 했었는지도 모르고. 그녀가 어느 정도는 자신을 굽히고 내게 보인 호감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내 편견이 어떤 시도들을 굴절시켰을지도 모른다. 뭐, 완전히 아웃 오브 안중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아닌 거고 니가 아닌 건 상관없어.’라는 태도가 지금 생각해보면 좀 멋있기도 하다. A가 M에게 여러 날을 참다가 입 밖으로 외쳐버린 ‘나는 니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M은 늘, 언제나, 말로 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게 해냈다. 상대 좋으라고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합리적 판단 아래 A가 M에게 했던 경고는 사실 M의 입장에서는 합리적 판단 아래 자신이 A에게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A의 말처럼 M 또한 M 나름으로 어떤 부분들을 참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꼭 친절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참 착하다.’라는 말을 칭찬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도, 참 착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까지 부러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걸 참 늦게 알았다.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안 해도 될 일, 하기 싫은 일을 많이도 해왔다. 불만은 삼키고 뒤에서나 구시렁거리는 찌질함만 키웠다. 여전히 거절이 어렵지만,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안에서만 어렵다. 합리적 판단 아래 종종 뻔뻔하게 굴기도 하고. 약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조금 뻔뻔하고 약았다고 그게 뭐 그렇게 나쁜가 하면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어쩌면 스스로가 심하게 착하다고 믿는 이들로부터 나온 말은 아닐까 싶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눈치를 보면 보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우리는 사실 다들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 것이다.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굳이 하지 않으면서, 또한 상대가 좋아할 만한 일만 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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