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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Jan 01. 2020

언제까지 있을 거야?

How long will you stay here for?

국어 선생님은 글짓기 소재로 꿈에 대해 쓰라고 했고, 미술 선생님은 이번 시간에 그릴 장소를 교내 분수대로, 음악 선생님은 시험 볼 악기를 리코더로 정해줬었다. 초등학생 때 마인드맵 만들기를 배웠고, 고등학생 시절 자유주제는 결코 자유롭지 않고 창작의 고통만을 배가 시킬 뿐이라며 자유주제로 주제를 정하는 뭇 선생들을 무책임하다고 꼬집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한정’은 집중도를 높인다. 그것이 창작이든 다른 것이든.  

   

여행 중이거나 얼마간 그곳에서 사는 중인 모든 백패커들의 단골 질문은 ‘온 지 얼마나 됐어?’ 내지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다. 통조림도 아니고 기한을 가진 사람이라니. 어쨌건 나는 이 ‘기한’, ‘한정’에 엄청나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 중에 하나다. 생애를 쪼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계획을 통해 동기를 갖고 나름 의지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물론, 이 통조림의 기한이 끝난 이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데, 뭐, 현재를 꽤 만족하면서 살고 있으므로 이도 저도 아닌 채 불안해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자위한다. 더구나 너무 먼 미래는 사실 내 영향권 밖의 일이므로 삶의 고통만을 배가 시킬 뿐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연장선 위에 있을  나는 자주 좌절하거나 목적을 잃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해야만 하는 직장에서, 토요일은  쉬고 일요일 중반부터는 벌써 한숨짓는 주말에서, 걱정뿐인 걱정을 매일 하는 일상에서. 이런 반복과 일정한 패턴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조금  솔직하자면 익숙해져 가는 업무 속에서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고 어떤 결과를 수확해내는 보다 나은 조직원이 되어야 한다는 개인의 의지와 의무 사이에서 자신감을 쉽게 놓친다. 그래서 익숙해지는 , 경험자, 대외적 능숙 능통자가 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적당히 있다가 언제든 떠날  있는 에서 자유를 느낀다. 중독된 것일지도 모르고.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해 모국을 떠나 살아보기를 결정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몇 가지로 추려진다. 여행, 새로운 경험, 일상에서의 권태, 캐주얼한 생활에 대한 욕구 같은 것으로. 각자가 가진 기한을 다 채우기도 덜 채우기도, 연장을 하기도 하면서 1년 3개월 이하(뉴질랜드의 경우)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보낸다. 한정되어 있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 일할 때든 놀 때든 열심히,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열심히.     


여행은 이런 것도 같다. 현재를 즐기면서 진한 추억을 염두하는 것. 현재의 시간을 살면서 훗날 이 시간이 얼마나 아름답게 남겨질지를 기대하고 이미 과거가 된 몇 초전을 바라보며 아련히 눈을 감았다 뜨는 것. 비자는 워킹홀리데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 한정된 시간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계절을 담은 날씨, 해돋이, 해 질 녘, 공기 냄새, 언어, 이곳에서의 모든 것들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매번 실감하면서 산다. 오늘과 똑같은 날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면서 산다. 연료통에 채운 휘발유가 달릴수록 닳아 없어지는 것을 계량기를 통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시간이 날아가는 걸 본다. 내 남은 날의 눈금을 세며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최대한 해내려 한다.     


시간이 가까이에서 아주 선명하게 째깍거리면 그것이 실체로 느껴진다. 100세 시대 100년은 너무 멀고 또 많고 더군다나 100년이 될지 그보다 짧을지 아직 알 수 없어서 내 것 같지가 않은데 1년 3개월짜리 시간 한 묶음은 왠지 가늠하기에도 만만하고, 구체적이기도 해서 좀 사실적으로 내 것 같다. 시간을 내 운영 아래 두기 때문이지 싶다. 대체로 내가 내 시간을 장악하기보다는 시간에 장악되어 온 삶을 살아왔었기 때문에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능동적인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낀다. 삶 전체보다는 한 구간을 설계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기도 하고.     


인생을 멀리 보고 차근차근 나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계획을 계획으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뤄가는 사람들이. 나는 눈앞의 것밖에는 볼 줄 몰라서 현재의 ‘한정’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지만 이런 사람이 나뿐일까. 자신에게 한정과 한정과 한정을 덧대가면서 조금씩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현재를 꼭 미래의 초석 또는 디딤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 중간에서 잘못됨을 느껴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전부 다시 쌓으려면 막막하니까.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징검다리쯤으로 보면 어떨까. 건너려는 개울의 폭이 미래처럼 엄두가 안 나니 그저 발 앞에 돌 하나 놓는 거지 하는 식으로. 온 지 얼마나 됐냐고, 얼마나 더 있을 거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내 인생 전체에 대한 계획으로 답하지 않는 것처럼 가볍게. 삶이라는 이 한 단어가 지닌 너무나 무겁고 거창한 뜻을 작은 내 배낭 안에 매일 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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