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오랫동안 아주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 한 달여의 첫 해외여행을 앞둔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여행이 좋은 건 돌아 올 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스물서넛 즈음의 내게 이 말은 아주 멋졌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 가벼운 볼을 던지듯 어떤 문장을 툭 뱉고는 ‘그 의미를 곧 체감할 수 있을 거야’ 지었던 자연스럽고 따뜻했던 표정. 당시에는 어렴풋하기만 했는데 이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때의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이제는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삼주 반 정도를 남기고 있다. 서른둘. 일 년 이 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떠오른 이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달라졌다. 안정감을 찾는 것을 지루한 타협쯤으로 여기면서 오히려 불안을 느꼈던 지난날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돌아가고 싶다. 한국으로, 내 자리로. 여전히 내 자리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돌아가면 이제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세상에 서른이 넘었네 벌써가 아니라, 뭔가를 무척 깨달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삶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랄까.
오래 있고 싶었다. 한국을 다시 떠나기 전, 말하자면 뉴질랜드에 오기 전에는 사오 년 정도 자리를 잡고 지내봐야겠다 했다. 워킹홀리데이로 돈을 모아서 학생비자로 전환한 후 대학원에 들어가서, 졸업을 해서 워크 비자를 받아야지. 누군가들이 착실히 해내는 치열한 외국 정착의 현장에 뛰어들어 봐야지 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됐다. 굳은 결심이었는데 결국 바람 정도였다니. 나는 왜 이만큼 밖에는 안 될까 한편으로 생각하면서 그보다 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키운 건, 남들이 나를 패배자로 생각할지 말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주먹만 한 배포가 아닐까.
왜 바람 빠진 풍선이 됐을까. 누구에 비해 더 고생한 것도 아닌데 왜 스스로를 다 지쳐버린 사람처럼 취급하려고 하는 걸까. 반추해보면 뉴질랜드에 오기 전 2년 동안의 직장생활과 여기에서 보낸 일 년 여의 시간에 얼마간의 이유가 있다. 직장생활은, 뭇 직장인들이 다 그렇듯 확실히 업무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특히 첫 1년은 정말로 그랬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설었는데 맡은 업무 양이 많았다. 그래서 주눅 들어있었고 일을 하는 내내 맞는 건지 아닌 건지까지 의심하느라 더 바빴다. 그런데 업무에, 사람들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느슨해질 수 있었다. 요령도 생기고 넉살도 생겼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지금에 와서 느낀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안정되어 간다는 게, 사람들이 힘들지만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또 출근을 하고 주말만을 바라보며 다섯 밤을 보낸다는 게 어떤 것인지. 무엇보다 내가 맡았던 일들 중에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책을 만들기도 했고, 문화 관련 사업 계획서를 쓰는 것도 재미있었다. 카탈로그나 아카이브를 엮는 일도 좋았고. 회사에서는 개인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있었을 한계 안에서도 복지를 위해 힘썼던 곳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생활을 하고 난 후 겪은 뉴질랜드는, 외국에 있다는 데서 해방감을 느끼는 육체노동의 연속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이 꼴 저 꼴 신경 안 쓰면 그만인 속 편한 생활.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사람 참 간사하다. 속 편하고 싶어서 와 놓고는 속이 정말로 편하니 편한 줄 모르겠다는 심보라니.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내가 원했던 생활을 하고 있으나 끝나가는 시점에 와서 가만히 곰곰해 보면 과연 뭐가 얼마나 남았나 싶다. 그리고는 꼭 뭔가를 남겨야만 하나 하며 손을 저어 생각을 흩트린다.
뭐랄까. 남은 건, ‘안정’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나는 지금껏 한 곳에서 하나의 일을 꾸준히 해본 적이 없다. 우직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보며 ‘안주’할 뿐이라고 서둘러 여겼다. 사실은 불안했고 부러웠다. ‘안정’에 대한 마음가짐이 변한 건 내 생활뿐 만 아니라 부모님과도 관계가 있다. 어느 정도는 그들을 부양할 수 있는 딸이 된다는 게, 곁에서 살면서 그들의 일을 도울 수 있다는 게 큰 동기를 부여했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해줄 수 있는 자식이 되어갈 수 있다는 게. ‘안정’이 일정한 수입을 갖고 그 안에서 삶을 운영해가는 것만이 아님을 뉴질랜드를 겪은 후 알게 됐다.
여행이 좋은 건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돌고 돌아, ‘집’의 의미를 알았다. 집은 고향이나 부모, 오랜 친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뿌리 같은 것. 큰 뿌리 곁으로 난 수많은 잔뿌리들이 뻗어있는 곳이 ‘집’이다. 자주 불평했던 데에서 조차도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따뜻했었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곳. 어떻게 집이 딱 내가 살고 있는 한 시의 한 면의 한 길의 몇 번지일까. 내가 밟고 겪어온 모든 것이 통틀어 있는 곳이 집이지. 그 집에서 내가 자라왔으니. 잘 된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의 이런 내가 되어있는.
여행이 파나돌인 양 종종 삼켜대면서 나아지고 있구나 했었는데, 틀렸다. 집이,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안심이 흰쌀밥 같은 것이었다. 밥이 약이지. 이 밥을 씹고 삼키면서 단물을 느꼈던 거였다. 헛웃음이 약간 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다행스럽다. 아니었음 앞으로도 내내 뭐가 진짜인 줄도 모르고 뭐가 좋은 건지도 모르고 지냈을 테니.
그래 못 먹어도 고. 빨리 돌아가고 싶다.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