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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Oct 17. 2020

어떻게 지는 건지를 몰라서

He will be good dad

생강밭에 짚을 깔던 날이었다. 아빠, 엄마, 오빠, 나 온 식구가 모여서 풀풀 날리는 짚 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연신 짓궂은 농담을 하며 깔깔댔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집 근처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아빠는 일 시킨 것이 미안하고 고마워 오빠와 내 앞접시에 빨갛게 양념한 국물 갈비를 가득 퍼줬다. 배를 채우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는 철물점에 들러 다른 데 필요한 것들을 미리 사 가기로 했다. 아빠와 엄마가 철물점으로 들어가고 차에는 오빠와 나만 남았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 건너편의 태권도원에 눈길이 멈췄다.     


“저 태권도원 진짜 오래됐는데, 아직도 태권도 배우는 애들이 많이 있나.”     


운전석에 앉아있던 오빠의 고개가 태권도원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중에 자식 낳으면, 태권도는 꼭 가르칠 거야.”     


아이에는 별 관심이 없던 오빠였기 때문에, 그가 앞에 단 ‘자식 낳으면’이라는 단서도 놀라웠지만 문장 끝에 ‘꼭’이 붙은 것도 놀라웠다. ‘꼭’ 가르치기로 마음먹은 것이 ‘태권도’라는 것이. 이어, 태권도 앞에 ‘꼭’이 붙는 게 왜 이토록 놀라운가에 대해 속으로 자문하면서 반성하기도 했고. 어쨌든 이유가 궁금해서 오빠에게 물었다.      


“왜?”

“나는 지는 게 싫어서 뭘 안 했었어. 지는 게 너무 싫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이기고 지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로 한 거야. 태권도를 배우면 나중에 겨루기도 하고 그럴 거 아냐. 사범이면 오죽 잘 가르치겠어. 호신도 중요하지만, 무도 안에서 이기고 지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테니까. 그런 걸 배웠으면 좋겠는 거지.”     


오빠는 내게 늘 져주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오빠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더 탐이 나서 내 것은 두고 오빠 것을 뺏어 가져와도 오빠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주고 자기는 또 다른 것을 가지고 놀았다. 그럼 나는 또 그것을 뺏고 그럼 오빠는 또 주고. 이때부터도 자상했기 때문에 나는 오빠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듣고 보니 또 그래 맞아 그랬지 싶기도 했다. 오빠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가 학교로 불려 갔던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어려서 기억에 없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였다. 오빠가 같은 반 친구의 코피를 터트려버린 사건이었는데, 그때 오빠의 담임이 엄마를 호출했다. 오빠의 담임은 학부녀회 내에서 촌지를 받고 안 받고에 따라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선생으로 소문난 이였다. 엄마는 피해를 입은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를 만나 사과를 했고, 같은 날 담임에게 촌지를 줬다. 담임이 엄마를 호출했던 암묵적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도 있었으므로. 어쨌든 그 담임은 이후 오빠에게 친절히 대해줬지만 말미에 학생기록부에는 이런 식의 문장을 남겼다. ‘언행이 차갑고 지기 싫어함.’ 이 일화를 들으면서도 무척이나 놀랐었다. 나를 이토록 아끼는 착한 나의 오빠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담임의 실체 앞에서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에, 내게는 이토록 따뜻하기만 했다는 것에.     


이야기가 좀 샜지만 어쨌든, 오빠가 미래의 자식에게 태권도는 꼭 배워야 한다고 설명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생각해봤다. 나는 ‘지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인가에 대해. 한참 불리한 상황에서도 ‘언행이 차갑고 지기 싫어함’이라는 인상을 상대에게 남길 줄 아는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그간 내 도망의 행적을 두고 보자면 나는 ‘지는 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이다. ‘또 졌네’라는 확정이 나기 전에 도망침으로써 지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럼 한 번도 진 적이 없느냐면 당연히 아니다. 더 전에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만 느끼고 싶었던 거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 좋은 사람’의 가면을 내려놓기로 한지 꽤 됐지만 그 전에는, 마스크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는 지금처럼  맨얼굴로 나가지 못했다.      


오빠 말처럼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웠다면 나는 예의 바르게 이기고, 겸허하게 지면서 가면 없이 정정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한 길을 진득하게 파면서, 가끔은 비싼 콘서트를 보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5일 중 1박 2일은 오고 가는데 시간을 보내면서도 꿈같은 여행이었다고 말하는 중심부 안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또 뭐 그렇게 비겁한 사람인가, 중심부 바깥의 사람인가. 이기고 지는 것을 지나치게 선명히 나누고 위너와 루저를 지나치게 양끝으로 분리하는 건 이 시대 지성인으로서 하기엔 너무 뒤처진 행태가 아닌가, 주로 지는 사람의 입장으로 말한다.      


‘잘 지는 것’을 너무 어렵게 여겼었다. 실패를 느끼고, 후회를 하고, 자책을 하고, 상황이나 남을 탓했다가 다시 자책을 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그러다 불현듯 또다시 자괴감에 빠지고, 점점 옅어지고, 미약하게 성장하고. 이게 잘 지는 것이지. 오빠에게 ‘태권도’는 잘 지는 과정에 드는 시간을 조금 단축시키고 끝에 얻어내는 성장을 조금 더 선명하게 하는 인성교육 중 하나이자 상징이 아니었을까. 건강히 배운 유년으로 좀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이만큼 자라고 보니 보이는 작은 결핍들을 언제 채우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어른의 마음, 뒤늦게 지는 것을 배우고 연습하는 미숙한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섞인.     


지는 것에 유독 가슴 쓰려했다. 분노나 슬픔의 감정들이 만드는 집착은 언제나 찐득하게 붙어 떼어낸 후에도 자국이 남았다. 졌을 때, 실패했을 때의 비참함만을 곱씹었다. 규칙과 예의를 지키며 얻었던 승리와, 규칙과 예의를 지켰기 때문에 의미 있었던 패배를 이제야 골고루 떠올려본다. 나에게만큼은 찬란했던 성취와 지나고 보니 양분이 됐던 실패를.      


‘잘 지는 것’은 어쩌면 졌다는 사실 하나에만 몰두해 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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