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스스로를 격려하는 방법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보다 보면 속된 말로 '질리는' 부모상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를 대단한 조언처럼 반복하는 이들이다. 이제는 취업을 해야 한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결혼은 힘들다, 그렇게 집에만 있을 바에는 나가서 뭐라도 해봐라 .. 따뜻하게 조언하는 투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은 마치 그렇게 살다간 3년 안에 인생이 망해버릴 것 처럼, 미래가 끔찍해질 수 밖에 없을 것 처럼 격하고 불쾌한 감정을 잔뜩 쏟아낸다.
한 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의 기준에서 그는 더 생각나는 방법이 없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다. 생활비와 학원비를 위해 파트타임 업무를 하고, 스펙을 위한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스터디로 면접을 준비하고 엑셀로 지원 일정을 정리하며 꾸준히 좁은 취업의 문을 두드려 왔다.
그런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도대체 왜 내가 너 때문에 친구들 모임에서 기가 죽어야 하느냐!' 라 진심으로 말한다. 친구들의 자식들은 번듯한 직장도 다니고 부모 용돈을 챙겨주거나 손주 사진을 프사로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나눌 때 본인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취업이든 결혼이든 쉽게 주어질 결과였다면 온 가족이 엉겨붙어 고민하고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쉽게 주어질 수 없는 목표들이기에 그는 꾸준히, 자신의 나이에 알맞게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준에는 그것들이 어렵다기 보다는 당연한 일이며, 그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 잘 되고 있지 않으므로 그의 삶은 문제 투성이, 지적할 것 투성이라 인식한다. 위로는 안도와 나태로 이어질 수 있는 사치이며, 따끔한 일침으로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 는 불안과 강박이 어머니의 말 속에 가득하다.
그는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이 없고, 그러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기를 고른 적도,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태어난 적도 더욱 없다. 단지 세상에 던져졌을 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보다 환자 스스로가 가장 간절히 원할 결과가 아직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라기에는 그에게 주어지는 비난은 부당하고 가혹하지 않을까.
그렇게 그는 최선을 다해 한 주를 살아가다 예상할 수 없는 날카롭고 둔탁한 말에 찔리고 부러지면 병원을 찾는다. 골절상을 치료하는 정형외과 의사가, 매 똑같은 곳을 매맞아 골절되어 오는 환자를 보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 어머니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기대하는 대로의 자극과 깨달음을 주어 의미있는 변화로 이어질까. 현실은 반대인 것 같다. 오히려 어머니의 파상공세를 경험할 때 마다 그에게는 일상을 멈추게하는 무기력,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느끼게 하는 우울이 밀려온다. 차라리 그러한 말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한 시간이라도 더 시험 공부를 하거나 면접 연습을 위한 스터디에 몰두하였을 것 같다.
그의 삶이 불성실하며 그릇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들었다면 나 역시 필요한 조언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기준에서 그는 그의 최선을 이어가고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는 결과가, 그렇지 않아도 평균치,기준점을 잔뜩 올려 쳐 놓은 세상의 시선에 그럴듯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분석하고 지적하는 대신 응원을 하기로 했다. 약을 처방하고, 누적된 우울과 불안 증상이 만들어내는 왜곡되고 과도한 부정적인 생각을 다루고, 수용할 것과 전념할 것을 구분하며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쌓아가려 했다.
매번 비슷한 형태의 상의라도 수 백 번의 반복이 필요하다면, 수 백 번 이야기해도 된다고 환자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삶에서 수 백 번 동안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가 자신의 삶에 얼마나 진심이었고 또 지금도 그 최선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었는 지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나는 그 균형을 맞추는 노력을 할 것이라 이야기한다.
상처받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을 때면 우리는 그가 어떤 것들을 추구했는지, 꿈꿨던 독립된 삶과 행복의 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쉽진 않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함께 다독이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하루를, 한 주를 일년을 살아냈다. 진료를 받은 지도 2년이 넘었다. 새해가 되기 한 달 전 그녀는 처음으로 정규직 직장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여전히 진료실을 찾기 까지의 편견은 무수히 많다. 그 허들 중 하나가 '이 정도는 다 힘든 게 아닌가요.' 라는 인식이다.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졌다지만 여전히 '조금 힘들어서 와 봤어요.' 라는 이야기 보다는 '몇 년 전 부터 힘들긴 했는데 견디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왔어요.' 라 이야기하는 환자가 더 많다.
신체적 질환은 큰 병이 되기 전에 빨리 찾고 치유하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유독 심적인 고통은 버틸 수 있을 때 까지 버티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아이러니다. 최근 통계 상 우울증 진료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현장의 인식은 사회가 갑자기 병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진작 진료가 필요했던 이들이 정신과 진료에 대해 개선되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비로소 병원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족 간의 불화, 취업 고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을 수 없는 직장 내 갈등.. 스스로는 분명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하게 힘들다고 하기에는 일상적인 아픔들이다. 차라리 극단적인 학대의 피해자라면, 태어날 때 부터 부모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왔다면, 불치병을 앓는 가족을 돌보아 왔다면 힘들만 하다 라고 스스로도, 세상도 납득이라도 할 것 같다. 이렇듯 힘든 것 자체 못지 않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충분히 힘들만 한게 맞나?' 라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전 늘 평가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힘들다고 할 만한 일인가? 남들보다 유달리 고통스럽다고 할 만한 지점이 있는가? 스스로가 유난스럽고 예민한 것은 아닌가? '이정도면 나도 참 힘든 거야.' 라 한마디 건네는 것 조차 세상의 기준에 입각하여 눈치를 보게된다.
당신이 살아오며 힘든 순간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 왔는지,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돌아보면 좋겠다. 세상은 위로랍시고 따뜻한 말투로 '그 정도는 남들도 다 힘들어' 라 이야기해온다. 그 말은 위로가 될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위안이 되고 힘이 날까. 그보다는 당연한 아픔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더 쌓이지는 않을까.
남들도 다 힘들다. 그래서 나와 너 모두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사람도 있고, 이러한 사실이 나와 너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사람도 있다. 힘든 마음에 객관적인 지표나 옳고 그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삶도 그 삶에 알맞는 불안과 좌절이 존재한다. 세간의 평가를 뒤로 하고,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풀어가기 힘든 과정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 만으로 위로받고 격려받을 자격이 충분한 이유다.
스스로에 대한 일침이나 비난은 이를 통해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시도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이러한 접근이 '실효적인' 경우는 잘 없다. 삶의 고통은 원인이나 방향을 몰라서라기 보다는 나아갈 방향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의 결과가 무조건 주어질 수 없다는 당연한 불확실성이 존재해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까 라는 화두에 대하여, 그러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문제가 많고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이 의미있는 변화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환자의 어머니가 환자를 대했던 것처럼, 오히려 그러한 과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힘 마저 잃게 할 지도 모른다.
합격 가능성이 보여 어떠한 시험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면, 불확실결과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일 하루 만큼 공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할 것이다. 반대로 오래 누적된 실패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이제는 다른 방향을 선택해야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때면 과감히 가 보지 않은 길을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어느 쪽을 위해서도 무작정의 비난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는 이대로 가면 인생이 망가질 수 밖에 없으니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해, 정신 차려야 해!' 라는 압박과 '충분히 고생이 많았지만 원하는 결과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다른 선택을 해 볼 용기를 내 보는 건 어떨까.' 라는 격려, 같은 의도라도 말은 다르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어떤 방향의 생각과 관점이 스스로에게 짐이 되고 또 힘이 될까.
덮어놓고 듣기 좋은 말, 편안한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게 충분히 비판적이진 않은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잘못되었는지, 혹은 앞으로 잘못될 수 있는지에 대해 몰입하는 것은 쉽지만 그간 고생 많았다고, 쉽지 않은 삶을 잘 살아 내고 있다고, 비록 지금 결과가 미진하긴 하지만 노력 만큼은 진심이었다고 격려해주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세상 탓이다' 라는 이야기로 애써 화살을 돌리려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러한 비난을 경청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고생많다 다독이면 표현하면 세상 탓만 하는 불성실한 사람이 되는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삶의 순간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현상에 세상이든, 나 자신이든 꼭 누군가 잘못한 사람, '범인' 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거부한다. 단지 삶을 살아내고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어려움도 만난다는 것, 그 어려움으로 인한 고단함은 다독여주면 좋다는 당연한 이야기만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실제로 당신이 원하는 삶으로 인도할 말과 관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려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고생 많다고, 잘 해나가 보자고 다독인다고 해서 우리가 안심하고 삶을 포기할까? 몰아세우면 몰아 세울수록 더 열심히 할까? 실제의 삶은 늘 반대로 작용해왔다. 살게라도 해주는 것이 위로다. 그나마 이어가게 도와주는 것들이 소소한 소중함들이다.
돌아보면 가장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혔던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 이는 객관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의 삶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괴롭힘이었다. 나 스스로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기에, 겉으로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어떤 취약점이 있고, 어떤 부끄러운 성격과 과거가 있는 지도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내가 나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보다 더 무서운 비난과 혐오도 없다. 어느 누구보다 냉철하게, 또 날카롭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난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 때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최대한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우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 조금의 허점도 용납하지 못하고 어떻게 내 삶이 잘못될 수 있는 지를 대비하도록 다그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오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오해는 결국 삶에 대한 혐오와 극심한 번아웃으로 이어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과 화해를 하며 나는 더욱 열심히 살아간다. 어떻게 내가 잘못되어 있는 지, 혹은 잘못될 수 밖에 없는지를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소진되는 마음의 여력을, 스스로의 삶과 소중한 것들을 위한 노력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당신도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순리대로, 상식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노력의 순서로 시험 등락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의 원리는 그렇게 되어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최선을 고민하고 또 이어갈 수 있는 힘이다.
위로마저, 받을만한 자격을 따지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오늘 하루 살아내느라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눈치를 본다. 이 정도는 되어야 힘들다고 인정할 만한 기준을 생각하는 것 부터가 함정이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수고롭다. 나는 당신의 그 일상적인 수고로움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다. 적어도 위로와 격려의 자격을 논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는 살아가고 있다는 고됨을 감내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이자 예의다.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위 하나라도 '실제로' 당신을 위하는 것이면 좋겠다. 확신이 없는 하루하루를 내딛느라 고생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한 다그침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삶을 한 발 더 내딛을 용기를 줄 힘과 위로, 따뜻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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