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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Sep 06. 2018

광주와 워싱턴, 서울과 평양의 이야기

*2018년 1월 8일 티스토리 블로그에 먼저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글쓰기는 늘 결론부터 시작하는게 최고라고 배웠는데, 그 기준으로 보면 이 글은 일단 실격이다.  하고 싶은건 2018년 서울과 평양의 이야기인데, 그 결론까지 가려면 일단 1980년의 광주와 워싱턴으로 조금 멀리 돌아서 가야 한다.




 "지금 부산에는 미 항공모함 2대가 정박중에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전두환의 살육을 더이상 방지하고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1980년 5월, 광주의 거리에는 이런 내용의 대자보들이 붙어 있었다.  그만큼 거리로 나선 광주 시민들에게 미국은 잠재적 구원자이자 최후의 희망이었다.  미국은 우리 나라를 북침과 가난에서 구해준 형제국일 뿐만 아아니라, 그들 역시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만들어낸 혁명 국가였다.  1976년에 백악관의 주인이 된 지미 카터 대통령은 공화당 정권의 실리주의 노선에서 탈피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도덕외교를 부르짖으며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인권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미군 철수까지 고려하겠다며 압박하던 원칙주의자였다.  그 누구도 그런 카터가 이끄는 미국이 광주를 외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워싱턴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군 항모에 희망을 거는 대자보들이 붙은 5월 25일, 미국은 이미 신군부와 접촉하여 무력 진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둔 상태였고, 곧이어 국가안보위원회(NSC)를 통해 일단 무력 진압을 용인한 뒤 "인명피해가 적을 경우 점진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고, 인명피해가 많을 경우에는 다시 만나 후속 조치를 논의" 하는 것이 카터 행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며칠 후, 미국의 동의 없이는 함부로 움직일수 없는 수도권 사단들을 필두로 신군부의 병력이 광주로 진격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미국의 후속 조치는 없었다. 


미국의 선택이 우리에게는 비극이었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합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냉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미국 외교가에서는 아직 친미 정권의 붕괴가 제3세계의 연쇄 공산화로 이어진다는 도미노 이론이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미국은 이미 바로 전 해인 1979년, 중동 지역의 든든한 동반자였던 이란 왕정을 시민 혁명으로 잃은 상태였다.  말그대로 냉전의 최전선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된다면 도미노가 한번에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섬뜩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미국은 우리 국민의 인권을 외면하며 실리를 택했고, 이 선택은 우리 정치권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반미주의를 민주화 세력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집회에는 점차 전두환 정권과 함께 미국도 성토하는 구호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방화 사건이, 이어 1985년에는 서울 미국문화원에서 점거 농성이 벌어진다.  사실 이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망명을 지원하고, 1987년 6월 항쟁 때는 무력 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전두환에게 그것만은 안된다고 엄중히 경고하는 등 이후에는 미국이 우리 민주화에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기여한 부분도 있다.  아주 뻔뻔하게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 표면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관계를 유지한 것이 이후 결정적인 순간에 압력을 행사하며 민주화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자기합리화로 덮어버리기에 우리 국민이 느낀 배신감은 너무나도 컸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보 진영과 반미주의의 연결고리는 아직까지도 한미관계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오랜만에 북한과 고위급 회담을 하는 모양이다.  이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트럼프의 트위터 도발(?)로 초긴장 상태에 접어든 한반도 정세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해법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강경하게 압박하는 동안 우리가 대화로 출구를 만들어 주는 전형적인 당근과 채찍 작전이다.  북한이랑 말 한마디 하면 곧바로 무조건 항복과 동일시하는 극우주의의 낡은 잣대로 이런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대화를 통해서 얻을게 없을수도 있지만, 반대로 딱히 대화를 한다고 해서 꼭 이것저것 달라는 대로 퍼줘야 되는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직접 말했듯이, 과거처럼 유약하게 끌려다니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면서, 정보 수집과 약간의 긴장감 완화만 얻어가도 성공이라는 편한 마음으로 협상에 임하면 그만이다.


다만 우려하는건 과거에도 남북간의 대화 분위기에 물이 오르면 언제나 슬그머니 북한 인권 문제는 미묘한 위치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올림픽이든, 정상회담이든, 경제협력이든, 늘 뭔가 굵직한 성과가 보이려 하는 시점이 오면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실효성 없는 이상주의로 치부되었고, 심지어 일각에서는 북한 정권의 심기를 건드려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쉬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2007년에는 우리 정부가 UN의 북한 인권결의안 투표에 기권했고, 우리의 북한 인권법은 미국보다도 12년이나 늦은 2016년에서야 제정되었으며, 그마저도 지금은 실질적으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자는 얘기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만은 아니다.  1980년 광주의 예가 보여주듯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오늘의 도덕적인 가치는 미래의 실리와 직결될 수 있다.  미국은 냉전 시절 민주주의, 인권 등 "미국의 가치"를 배반하여 전두환 정권을 비롯한 많은 친미 독재 정권을 지원했고, 이런 행동은 이후 반미주의라는 곤혹스러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오늘날 미국의 최대 안보 위협인 이슬람 근본주의 역시 이런 부끄러운 과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반도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도 북한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지 않다.  언젠가 통일의 날이 온다면, 그때까지 지구상 최악의 정권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던 북한 동포들은 반드시 민주주의 체제의 정의로움에 대해 떠들어대던 우리가 김정은 정권과 어떤 관계를 가졌고, 북한 인권에 대해 서는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돌아보고 평가할 것이다. 


그 평가에 부끄럽지 않게 응하려면 지금부터 국내에서, 국제 사회에서, 그리고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도 북한 인권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핵무기는 절대 놓을수 없다며 처음부터 협상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듯, 우리 역시 아무리 대화가 잘 풀리고 성과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양보해서는 안된다.  더불어 정부는 지속적으로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 사례를 기록하고, 북한 인권과 관련된 단체를 후원하며,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맨땅에 해딩하는 듯 무지하게 허망하겠지만, 먼 훗날에는 이런 행동들이 민족 공동체 복원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북한 인권 문제는 한단계 더 나아가 남북 교류협력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모든 대북 지원이나 경제 협력은 김정은 정권과 관계를 개선하여 그들과 통일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에 억눌려 있는 북한 동포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고, 외부 세계에 대한 접촉을 넓히면서 이들이 통일의 전제조건이 되는 정치적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고위급 회담에 나서는 우리 정부의 대표들도 눈앞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정은 정권의 대표단은 매개체일 뿐, 우리의 진짜 협상 파트너는 북한 동포들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원칙을 유지하며 강단있게 협상에 임한다면 보수, 진보 관계없이 만족할 수 있는 멋진 결과가 언젠가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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