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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Sep 06. 2018

미투 (Me Too), 유투 (You Too)

*2018년 3월 6일 티스토리 블로그에 먼저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어제 저녁 8시 10분 경, 김지은씨의 고백이 JTBC 전파를 타면서 안희정의 상습적 성폭력 혐의가 세상에 드러났다.  2시간 20분 후, 더불어민주당 긴급최고위원회의가 만장일치로 그의 출당 및 제명을 결의했다.  그리고 3시간이 더 흘러, 안희정 본인이 페이스북을 통해 혐의를 인정하고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이렇게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로 꼽히던 한국 정치판의 초대형 거물 중 하나가 가면을 벗고 야수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여섯 시간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권력의 언저리만을 맴도는 듯 했던 미투의 바람은 한순간에 그 중심을 비집고 들어가는 광풍이 되었다. 


나는 지난 대선 당시 안희정을 지지했었다.  굵직한 정국 현안에 비하면 인권 같은건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는 한국 정치판에서는 그동안 통치자의 정책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개인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안희정은 다른 듯 했다.  국가권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개인 권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또 그 중요성을 간결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선 주자급 정치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정책에 대한 의견은 그닥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통치의 언어”만이 만연했던 한국 정치판에서 “권리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 만으로도 반가운 충격이었다.  대선 기간 중 SNS에 그를 지지하는 내용의 글도 간간히 썼고, 악명높은 민주당 경선 재외국민 등록절차를 굳이 통과해서 기어이 그에게 한 표를 던졌다.  그렇게 나 또한 안희정의 위선에 속은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이번 사건을 접하고 미투 운동의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각계각층의 피해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지금과 같은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가 아니고, 김지은씨의 폭로가 단발적인 스캔들에 불과했다면, 과연 지금처럼 권력자들은 그 어떤 방어도 시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안희정을 내칠 수 있었을까?  나처럼 한 때 지지자였던 사람들도 지금처럼 그 어떤 궁색한 변명도 없이 깔끔하게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을까?  마음같아선 지금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용기가 하나가 되어 큰 변화의 원동력을 일구어 냈기 때문에 비로소 정치 권력과 대중의 인기를 모두 가진 안희정 같은 인물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지금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전형적인 멘스플레인이 되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질책하면서도, 일단 쓰기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지어볼련다.) 


그래서 미투가 소중한 것이다.  이 운동의 본질은 단지 가해자를 향한 피해자의 외침이 아니다.  미투 운동의 폭로는 그 범위를 처벌이 가능한 사람의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행위로 제한하지 않는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기본중의 기본, 첫단계일 뿐, 목표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정치 현안들이 인권을 “부차적인 문제”로 만들어 버리듯,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가해자에게 능력이나 권력이 있다면 젠더 폭력은 그냥 피해자가 참고 넘어가야 할 사소한 꼰대질 정도로 인식되는게 보통이었다.  안희정, 안태근, 고은, 이윤택 등 상습적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다수가 자기 분야의 정점 언저리에서 권세를 누리는 것만 보더라도 한국의 조직 사회가 지독하게도 가해자를 보호하는 구조임은 명확해진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그 사람 참 능력은 있는데 손버릇이 나빠서 걱정이다..." 라며 은근히 비호하는 늬앙스의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미투운동은 그렇게 하나하나 따로 보면 그냥 쯧쯧하고 넘어갈 만한 일들을 한꺼번에 끄집어냄으로써 젠더 폭력은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충격요법의 일종이다. 


그런데 단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미투 (Me Too, "나도") 운동의 끝은 사실 유투 (You Too, "너도") 운동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여성과 남성의 권리에 차등을 두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너무나도 무감각한 우리 사회의 부조리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작은 무지, 작은 선입견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피해자도, 가해자도, 가해자를 보호한 조직의 일원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회의 구성원인 이상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건 내가 미투 운동의 피해자를 지지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위드유(With You) 라는 구호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단지 피해자를 보듬고 가해자를 욕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일은 너무나도 쉽고, 그것만으로는 스케일 크게 욕먹는 사람 몇몇 감옥 보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작은 가해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없이 자행해 온 작은 폭력들을 반성하고 고쳐 나가는 것이다.  


"작은 가해자" 라는 표현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남자는 다 나쁜놈이라는 단세포적인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행동도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역으로 사소한 배움 만으로도 우리 사회 속의 폭력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몰랐던 것을 깨닫고 고치는 것은 흠결이 아니라 자랑이고, 조금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다가오는 변화를 편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경험하며 눈부시게 발전했듯, 낙후된 우리 사회의 젠더문화에도 "미투의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내가 지지했던 한 정치인의 몰락을 보며, 그동안의 작은 선입견과 무지했던 행동들을 돌아보고, 또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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