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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Sep 06. 2018

난민 문제, 증오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2015 Mstyslav Chernov, all rights reserved

*2018년 6월 26일 티스토리 블로그에 먼저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못본척 지나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반면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공감하는 것 역시보통 사람은 못할 짓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 듣던 정치 철학 입문 수업에서 “출근길에 호수에 빠진 아이를 발견한다면 구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교수가 던졌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모두가 가던길을 멈추고 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구해놓고 몇 걸음 앞으로 갔더니 또 다른 호수와 거기 빠진 또 다른 아이가 있다면? 그런 식으로 회사까지 가는 길이 끊임없이 호수에 빠진 아이들의 연속이라면? 어느 순간에는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돕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모두 어느 시점에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더 이상 도울수 없다고 판단하는 한계가 온다. 


당시 교수님이 굳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제시하면서 하고자 한 이야기가 물론 “그러니까 앗싸리 다 죽게 놔두자” 하는 정신나간 결론은 아니다. 다만 “돕지 않는다” 라는것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자연스럽고 빈번한 선택인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그 선택에 수반되는 죄책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개발했고, 그 중 가장 쉬운 것은 “무시”다. 우리는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상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들 나쁜 사람이라 그런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때 겪을 죄책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때로는 무시해 왔던 일들이 눈앞에 덜컥 나타나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 인간이 택하는 또 하나의 도구는 “증오”다. 고통받는 사람의 흠결을 강조해서 그 고통 자체를  정의로운 일로 정당화하는 것 말이다.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좋은 예다.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 내에서의 인권 침해에 대한 소식은 밖으로 나와 공론화되는 경우 자체가 별로 없을 뿐더러, 어찌저찌 들려온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그럼 애초에 죄를 짓지 말아야지” 정도다. 이런게 무시에서 증오로 반박자도 쉬지 않고 순조롭게 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결국 난민 이야기다. 난민 문제에 대한 국내의 인식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시”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내전, 듣도 보지도 못한 인종과 종교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학살의 피해자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기에는 당장 우리 눈 앞에 급한 문제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제주도를 통한 예멘 난민들의 대규모 입국은 이 편리한 무시의 장막에 던져진 벽돌과도 같은 사건이다. 그 여파로 기존의 난민에 대한 “무시"가 난민에 대한 “증오”로 바뀌는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외국의 단편적인 이민자 범죄 사례로 난민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고,이슬람 문화권의 보편적 문제에 대한 정당한 우려가 난민이라는 개인에 대한 부당한 증오로 변질되어 본국으로 돌아가면 죽음을 피할 길이 없는 이들에 대한 외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지리적 여건상 아무리 많이 받아줘도 1년에 수천명 남짓이 고작일 난민들이 국내 범죄율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리도 없고, 우리 사회 안에서 가장 취약계층에 속하게 될 이들이 이슬람 문화를 기반으로 우리 문화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도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난민 제도는 당장 생명의 위기에 처한 개인을 급히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타문화권의 부조리한 관습을 심판하는 장치가 아니다. 외국에 나갔는데 “한국은 양성간 임금격차도 높고, 양심적 병역거부나 동성혼도 인정하지 않는 보편적 인권인식이 떨어지는 나라”라는 이유로 "나"라는 개인의 입국을 거부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실제 범죄자가 있다면 확인하고 걸러내면 될 뿐, 집단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난민 심사를 받는 개인이 입국해서 어떻게 할지 예단할 순 없는 일이다. 



진짜 걱정되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한번 불이 붙은 증오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그러들기보다는 더 뜨겁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훌륭한 반면교사다. 요 몇주간 미국인들은 뉴스를 통해 쇠창살에 갇힌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찾으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합법적 난민 신청을 통한 입국 시도조차 원천봉쇄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가 신청자 전원을 심사 기간 중 구금하고, 가족을 동반한 경우 아이들을 분리해서 집단수용소에 따로 수감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택했기 때문이다. 난민 심사가 끝난 후 이들을 부모와 다시 연결시켜주기 위해 어떠한 행정적 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사실상 미국 정부에 의해 기약없는 생이별을 당하게 된 경우도 많다. 보호자가 잠시라도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데 부모로부터 빼앗긴 후 행방이 묘연해진 10세의 다운증후군 소녀, 생후 1년도 안된 젖먹이들을 집단으로 가두어놓은 영유아 수용소, 듣기만해도 참담해지는 이야기들이 2018년 미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수십년간 조금씩 커져온 이민자에 대한 증오가 결국 점점 더 과격한 정책을 정당화다 나온 결과다. 


물론 큰 틀에서 난민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방법론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난민 자격이 인정된 자의 사회 적응과 범죄 방지를 위한 노력, 난민 심사 기간 중 자유로운 국내 체류를 허가하는 현행 제도의 당위성, 같은 국가의 신청자라도 여성과 소수자 등 상대적 약자를 우대할 것인지 여부를 비롯하여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정책적 고민은 우리 모두가 계속해야 한다. 다만 “어떻게, 얼마나 도와야 하는가”라는 정책의 언어가 아닌 “난민이 좋은가? 나쁜가?”라는 감성의 언어로 토의가 변질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집단에 대한 원색적 인식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를 무엇보다도 신성시한다는 나라 미국이 바로 그증오를 제어하지 못해 국가 권력이 부모에게서 우는 아이를 빼앗아 수용소에 가두는 이 지경에 까지 왔다. 증오가 미쳐 날뛰도록 끝까지 놔두면 2018년 미국도 아닌 1940년대 독일이 있다는 이야기까지는 굳이 구체적으로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난민 문제 역시 정책적 로드맵 없이 증오에 끌려간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어느새 악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지구상에 전쟁과 폭력에 신음하는 곳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럭저럭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나라에 사는 이상, 난민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스스로와 가족을 위해 좀 더 나은 곳으로 움직이려는 인간의 본성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 후, 그리고 군사독재 시대에 더 나은 삶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간 우리 할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예만 보더라도 자명한 이야기다. 뜬금없이 지구평화라도 이루거나 반대로 우리 나라까지 시원하게 망해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 앞에 주어진 선택지는 증오와 합리성, 두가지 뿐이다. 여기서 어느 쪽을 고르는지가 한민족과 대한민국이 다가오는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는지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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