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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G Sep 14. 2018

자유의지는 환상이다.

free will

흄의 포크 : 도미노와 주사위


 세상은 물질과 운동으로 이루어져있고 인간 또한 그 일부이다. 모든 것이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앞서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따라 뒷일도 결정된다. 아인슈타인이 말하길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신은 도미노 놀이 비슷한 걸 한다. 그래서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변명할 수 있다. '내 뒤에 있던 도미노가 넘어지면서 나를 넘어뜨렸어. 그래서 앞에 있는 도미노를 넘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중간에 껴있던 나도 피해자라고!' 뻔뻔하지만 모두 사실이다. 모두가 도미노인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누구도 인과율에서 벗어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인과와 상관없이 '랜덤'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이것을 불확정성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미시계의 '랜덤'이 거시계의 '랜덤'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사실 신은 도미노와 주사위 놀이 둘 다를 좋아하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세상일은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인간의 행동도 마찬가지로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이다. 누군가의 행위가 필연적이었다면 그 근본원인은 그 사람의 밖에 있다. 그의 행동은 다른 도미노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 만약 행위가 우연적이었다면 어떨까? 그건 아무 이유 없이 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사위 던져지듯 의도가 ’짠!‘하고 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행위의 원인은 행위자 본인에게 있지 않다. 사람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을 근거로 자유의지를 부정하기도 하고,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근거로 자유의지를 긍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론은 자유의지와 아무 상관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유의지는 없다.


행위가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자유의지는 없다


쇼펜하우어 : 인간은 바라는 것을 바랄 수 없다.


 내가 말하는 자유의지란 단순히 내키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역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근본적 원천을 ‘자기 자신’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른 요인에 전혀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보편적 정의이다. 그런 자유의지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예를들어 당신이 주스와 콜라 중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콜라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탄산이 당겨서’였다. 그렇다면 탄산이 당긴 이유는 무엇인가? 목이 타서 그랬다. 목이 탄 이유는? 그런 식으로 꼬리를 물다보면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이 당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의도한대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의도 자체를 의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의도 자체를 의도할 수 없다


보복을 정당화 하는 자유의지


 자유의지에 대한 통념적 믿음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근거로 할 때 처벌은 '교화'와 '억제' 보다는 '보복'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생리적, 유전적, 환경적 요인은 무시되며 감정적인 증오를 드러내는 데만 몰두하게 된다. 그래서 현대의 법철학은 범죄자의 죄질에 합당한 고통을 선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사람들은 고장난 자동차에게 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자가 고양이보다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해서 사자를 더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에볼라가 감기보다 치명적이라고 해서 에볼라를 더 증오하지는 않는다. 더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억제시킬 방법을 더욱 연구할 것이다. 하지만 흉악범에게는 경멸과 비난이 쏟아진다. 범죄자의 '망가진 자아'나 '나쁜 가치관'이라는 것도 결국 에볼라의 잠재성이나 사자의 위험성 같은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뚜렷하고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복잡하다고 해서 인간예외주의적 발상을 들이밀 필요는 없다. 인간은 단지 사자나 에볼라보다 더 많은 톱니바퀴를 갖고 있을 뿐이지, 물리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은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고장난 자동차에게 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인마 청년 A와 살인마 청년 B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다. 청년 A가 단지 재미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사람들은 당연히 청년 A에게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살해를 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청년 B도 단지 재미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하지만 청년 B의 뇌를 MRI로 검사해보니 행동 충동 조절을 담당하는 영역에 커다란 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의사들은 살해의 원인이 그것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 경우 사람들은 B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A의 경우 살해의 의도가 더 깊이 내재화 되어있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A를 더욱 비난할 것이다. B의 경우 살해의 원인을 역추적하는 과정이 간단한 반면 A의 '내재화된 배경'은 역추적이 매우 길고 복잡하며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인과관계의 커다란 그림을 상상해본다면 두 경우 모두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다. A와 B의 차이는 단지 기계장치에 톱니바퀴가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이다. 물론 B는 치료가 가능하고 A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A가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위해 보복성 처벌이 정당화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인과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록 A, B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본능과 직관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죄인에 대한 증오, 보복심리는 어쩌면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본성일지도 모른다. 직관적으로 그렇게 믿는 것이 심적으로 편하고, 그렇게 진화하는 것이 유리했을 수도 있다.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 본능이라면 그 믿음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본능이기 때문에 그저 따라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낯선 것을 배척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고 해서 지역감정, 민족주의, 인종차별 등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인과관계의 커다란 그림에서 눈을 돌려버리고, 범죄자를 무작정 비난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그 때서야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흉악범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이 그가 지닌 잠재적 위험성마저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에볼라와 마찬가지로 더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억제시킬 방법을 더욱 연구할 수 있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갖는 것은 우리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자유의지를 믿지 않아도 책임을 부여할 수 있다.


 내 주장에 대해 이러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면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누가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자동차에 치인 아이의 치료비를 운전자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수많은 책임들을 그저 회피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자유의지의 주술에서 벗어난다면 '너는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 몇 년 갇혀서 고통 받아라'는 식이 아니라 유용함의 정도에 따라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증오와 보복심리를 배제한 채 변화가 가능한 사람들에게 변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서적으로 위험한 범죄자는 가능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격리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도 물리법칙을 따르는 자연의 일부이다. 개인과 사회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힘을 쏟을 대상은 자연 그 자체이다. 인간 내부에 인과적 주체가 있다는 환상에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



자유의지를 믿지 않아도 미덕을 보상할 수 있다.


 반대로 미덕으로 인한 명예는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가 없다면 사회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보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자유의지가 없다면 한 인간이 훌륭한 미덕을 갖추게 된 근본적 원인 또한 그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 팽배해있는 성과주의는 다소 결함이 있는 것이다. 계급사회는 단순히 높은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유리할 뿐이고, 성과사회는 단순히 성과를 올리기 좋게 태어난 사람에게 유리할 뿐이다. 이 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단순한 귀족주의가 아닌 도덕적 논리가 된다. '내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으니 내가 명예를 갖는 것이 당연해.'가 아니라 '내가 이런 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성격과 재능 그리고 주변 환경 덕분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관점에서는 흉악범을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사회에 위협이 되는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앞서 설명하였다. 마찬가지로 미덕을 갖춘 사람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때 개인 차원의 보상의 근거가 될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노력'이다. 어떤 사람이 선량한 행위를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면 아마 지속적인 고생을 겪었을 것이다. 사회는 그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뎌낸 것을 공로로 보고 치하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이 논리에도 난점은 있다. 일단 노력은 측정이 불가능하다. 별다른 노력 없이 즐겼을 뿐인 천재, 노력해도 안 되는 범재라는 예외가 존재하며, 노력하지 않는 삶이 반드시 편안한 삶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영웅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그가 선천적, 후천적 환경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의지로 해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유의지를 믿지 않더라도 여전히 영웅적 행위를 보상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는 것 또한 문제 될 것이 전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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