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요?
<목차>
1. 몸이 곧 나다.
2. 뇌가 곧 나다.
3. 정신이 곧 나다.
4. 의식이 곧 나다.
5. 나는 패턴이다.
'나'라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정확히 어디죠? 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YONG입니다.' 그럼 제가 법원에 가서 개명신청을 한다면 저는 사라지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름은 그냥 누군가를 지칭하기 위해 편의상 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제 이름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입니다. 그 말은 인간으로서의 제 몸이 곧 나라는 거죠. 그렇다면 제가 발톱을 손질할 때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을 때마다 저는 조금씩 사라지는 걸까요? 만약 제가 사고로 인해 신체의 일부를 잃는다면, 예를 들어 다리를 잃거나 장기의 일부를 떼어 낸다면 저는 제가 아니게 되나요? 그래도 여전히 저는 온전한 나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로봇 의수를 착용하거나 인공장기를 이식받은 경우는 어떤가요? 천체망원경으로 은하수를 관찰할 때, 자동차를 운전할 때, 그러한 보조 도구들을 나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몸은 고정되어있지 않습니다. 몸에 있는 세포들은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합니다. 하나의 세포가 수명을 다하면 그 자리를 다른 세포가 메꾸죠. 대부분의 세포는 6개월 정도를 주기로 교체됩니다. 그렇다면 6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요? 아무래도 나의 범위를 좀 더 좁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신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위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이나 익스트림 스포츠 선수들은 머리를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합니다. 머리 안의 뇌를 지키기 위해서이죠. 왜 우리는 뇌를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나요? 그건 우리의 뇌 안에 좋은 추억, 트라우마,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각과 감정, 사고, 습관, 이런 것들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는 심장의 작동유무가 삶과 죽음의 경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뇌가 작동을 완전히 멈추었을 때 비로소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사람의 뇌 안에 그의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고 여깁니다. 누군가가 치명적인 사고로 인해 뇌의 일부분을 다친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지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예전의 그는 죽은 건가요? 특정 신경의 손상 때문에 몇 가지 색을 인지하지 못하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는 예전과 다른 사람인가요? 전두엽을 다쳐서 더 이상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요? 뇌 또한 다른 신체 부위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변합니다. 뇌세포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죠. 뉴런의 수명은 대략 7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아닌가요?
신체기관으로서의 뇌가 아니라 뉴런을 오가는 전기적 신호, 즉 정신을 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를 나로 보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먹은 영양분들이 소화를 거쳐 신체를 구성합니다. 마찬가지로 뇌세포들도 외부로부터 섭취한 음식들이 변한 것이죠. 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은 소프트웨어입니다. 뇌과학자 세바스찬 승은 커넥텀(신경세포의 연결망 지도)이 곧 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경계를 어디까지로 봐야할까요? 대뇌와 소뇌에서 일어나는 신호만을 나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뇌간과 척수에서의 신호까지 나로 포함 시켜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신경망을 다 나로 보아야 할까요?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곳 없듯, 찔러서 아프지 않은 곳도 없습니다. 즉 신경세포는 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에 뻗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 역시 경계가 모호합니다. 과학자들이 모여 '딱 여기까지만 정신이라고 부릅시다!'하고 합의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임의적이고 지리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앞서서 제가 '뇌세포와 달리 정신은 외부의 영양분이 변한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정신 또한 외부로부터 섭취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영양분을 섭취하듯 우리는 경험을 통해 생각을 섭취합니다. 저는 과거에 글자와 키보드를 다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천적인 본능 또한 선대로부터 유전되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건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감고 사과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세요. 그 사과를 보는 건 누구인가요? 바로 '나'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과를 인지하나요? 바로 '의식'입니다. 제가 말하는 의식은 생각, 감각,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사과를 떠올리는 건 생각이지만 떠올린 그 사과를 바라보는 건 바로 의식입니다. 생각과 감각, 감정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전기적 운동의 일환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물질적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호르몬의 분비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전기신호가 척수를 지나 근육으로 전달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의식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의식은 그러한 현상들을 경험하는 '관찰자'입니다. 신경과학자들은 의식이 뇌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의식 자체는 뇌가 아닙니다. 의식은 물질에서 비롯되지만 의식이 곧 물질인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의식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은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앞서 하던 얘기를 계속 해보겠습니다. 머릿속의 사과를 바라보는 이 의식만큼은 확실히 나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느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의식이 고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꿈 없는 잠에 깊이 빠져있을 때 우리의 의식은 잠시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의식이 매 순간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깜박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식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의식은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죠.
저는 의식이 분명 나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오직 의식만이 나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의 몸, 뇌, 정신을 비롯한 제 정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유동적이고 경계가 모호하다는 이유만으로 나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나'라는 단어 자체는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범위가 제각각입니다. 어쩌면 '나'는 단지 인간이 편의상 정해놓은 정의일 뿐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강과 바다를 나누지만 사실 강과 바다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경계는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 입니다. 석가모니는 '나는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나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동떨어져 있고 모순적인 주장 같지만 사실 둘은 같은 의미입니다. 저 두 문장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나누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참고로 무아無我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연속성'을 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그 때 그 때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과 생각이 (거의 같게끔)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7년이 지나 모든 세포가 교체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저는 7년 전 기억을 (모호하게나마)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죠.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저를 알아봅니다. 나란 바로 나를 구성하는 모든 유동적이고 연속적인 '패턴'입니다. 그러나 그 패턴은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명확한 경계도 없습니다. 이러한 느슨한 관점에서는 나의 영향력이 닿아있는 모든 것들을 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고 발행한다면 그 글도 곧 나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 어떤 독자의 머릿속에 스며든다면 그 독자 안에 제 일부가 살아있게 됩니다. 약간 소름끼치는 생각이죠. 만약 언젠가 저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면 그 아이는 제 몸의 일부를 떼어 갖고 있는 것이고, 그 아이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훗날 스승이 되어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이 대를 거듭하여 이어질 수 있습니다. 유전자가 번성하듯 가르침도 번성할 수 있는 거죠. 제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줌으로서 그들 안에 살아있을 수 있듯, 제 안에도 다른 무수한 존재들의 패턴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패턴의 네트워크는 거의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내가 곧 모든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그가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도 그 말은 충분히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루는 자아란 생물학적인 경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고흐는 고흐의 그림으로서 살아있으며 헤세는 헤세의 글로서 살아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겐 자아의 경계가 뚜렷하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공상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모두 패턴이며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예로부터 불멸에 대한 욕구는 오만하고 덧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자아를 패턴으로 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영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