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저자데이비드 오길비출판다산북스발매2008.04.05.
대학교 4학년 때 도서관에서 브랜드 이미지 전략을 주창했던 광고계의 거장 데이비드 오길비에 관한 책을 보다가, 광고회사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기 저기 원서를 내고 다녔다. 막연하게 TV를 보고 보이는 카피가 멋있어서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원서를 쓰려고 보니 디자이너나 카피라이터는 포트폴리오를 내라는 항목이 보였다. 그때부터 좌절이었다. 포트폴리오가 뭐야? 아무것도 없는 나는 카피보다는 기획 쪽으로 원서를 고쳐 썼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영어면접을 보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국제광고팀에 지원했다 나름대로 나의 전략은 맞아 들어갔다. 나는 그 당시 광고업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도전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합격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면접했던 실무 차장님에게는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을 엄청나게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누가 면접을 보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좋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국장님 면접에서는 영어로 진행되었는데 나보고 교포냐고 했다. 아마도 캐나다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까먹기 전에 영어를 좀 했던 것 같다. 사장님 면접까지 무사히 통과해서 입사한 회사는 내가 아는 것보다 어마어마한 회사였다. 당시에 독립 광고 대행사에서는 업계 1위를 하고 있는 회사였고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광고 회사에서 첫 회의에서 만난 크리에이티브 한 사람들의 모습이란 너무 충격적이었다. 회색 머리, 노랑머리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이디어를 침 튀기며 이야기하는데 너무 멋있고도, 나는 그들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들이 뭔가 되게 멋있고 특별한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광고 전공자도 아니고, 광고 아카데미 출신도 아닌 나이기에 못한다고 나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잘하는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무엇을 잘했어도 꺼내놓기가 어려웠고 남들이 이게 뭐냐고 비웃을까 봐 우물쭈물 잘 설명하지도 못했다. 사실 회의실에서는 아무거나 던지는 것이 일상이고, 누군가 스치듯이 던진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서 조금 비틀고 바꾸어서 살려내는 일이 부지기 수이다. 밤새워서 무언가를 가져가도 빛을 못 보고 쓰레기통으로 가는 경험도 많았고, 어떤 날은 쓰레기통에서 다시 꺼내서 탈탈 먼지 털어서 좀 바꿔가면 또 잘 팔리기도 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회의실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몇 시간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매달렸던 하나의 주제에 딱 맞는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광경을 많이 목격했다. 그 경험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고 지금은 나는 워크숍에 굉장히 강한 사람이 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무엇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책이 많았다. 어쩌면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위축감이 나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기업에서 가장 창의적인 일을 하는 부서가 마케팅부이다. 마케팅 부서에서 14년이나 일했다. 마케터는 같은 것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던 마케터 출신의 임원의 말씀을 깊이 새겼다. 마케팅 업무 중에 가장 크리에이티브 한 작업들을 하는 곳이 광고업무다. 광고 회사에서 7년이나 일하면서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다. 그렇게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창작해 내야 한다는 압박에 힘들었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좋아했는지도 모르겠고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자민 마음속으로는 늘 부족함으로 갈증을 느끼며 살았다. 광고 대행사에서 나의 삶은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가장 강도 높은 업무와 일에 대한 열정이 터져 나왔던 시기이다. 젊은 시절을 그렇게 뜨겁게 달구었기에 그 자산으로 평생을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하는 내내 마음 한편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불안함에 시달렸고, 자격지심에 떨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조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존감이나 자신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도 나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대해 즐겁게 상상하고 내놓을 수 있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멋진 생각을 해라고 나를 낮게 생각하면 내 아이디어도 별로라고 생각하게 된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무언가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내는 문제 해결력이다.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믿어야 그 문제가 해결된다.
가장 이성적이고 정확해야 할 것 같은 금융업계에서 일했다. 거기서도 마케팅일만했기 때문에 기업 전체에서는 가장 창조적인 일이었다. 모든 것이 숫자로 돌아가는 은행에서 분석적이고 전략적이어야 했다. 처음 이직을 했을 때 브랜드 매니저로서, 마케팅 아이디어나 브랜딩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주장할 때 어느 상품 담당자가 “나는 미술은 모르겠고..”라며 빨리 컨펌을 하라고 했다. 브랜드 가이드라인 같은 것은 미술이고 예술 같다고, 지금 급하니까 그냥 나가자고 했다. 처음 가서 꽤 충격적인 말을 듣고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 뒤로 은행에서는 원 페이지에 간단하게 목표와 결과 집약적으로 요약해서 포인트만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신기하게도 회의 종류에 따라 나는 예술 하는 “딴따라” 취급을 받기도 하고, “창의적인 마케팅 전문가”로 포지셔닝 되기도 했다. 세일즈 숫자를 올려야 하는 긴박한 회의에서는 나는 한가하게 브랜딩 어쩌고를 하며 돈을 쓰려고 하는 사람으로 보여서 안간힘을 쓰며 내 일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상품을 런칭하거나 시간을 두고 브랜딩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는 마케팅 전략 미팅에서는 나는 창의적인 전문가 소리를 들었다. 상황이나 환경이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 나를 그렇게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완벽한 전문가'가 되려면 더 열심히 부족한 것들을 개발해야 한다고, 아직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6,000명 중에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한 명이었다. 광고 대행사 출신으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도 잘 알지만 은행에서도 오래 근무해서 내부의 온도를 잘하고 우리 브랜드를 이해하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실무진은 나 하나였다.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명문대와 비교했고, MBA와 비교했고, 교포와 비교했다. 겉으로는 매우 당당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늘 자격지심 덩어리였다.
지금에 와보니 나는 매번 나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메꾸려고 애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그 집단의 주류와 나를 비교하고, 나는 더 잘 못한다고 스스로 움츠려 들었던 것 같다. 나의 창조성과 창의력에 대한 깊은 고뇌의 시간들을 떠오른다. 어느 조직에서나 나는 늘 열심히 일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나는 나의 빈 공간만을 보고 더 잘하려고 나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힘든 일도 즐겁게 했고 열심히 했지만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날들도 많았다. 그러니 내가 가진 진정한 창조성을 더 발휘하지 못했고, 나의 전략이 훌륭하게 성공했음에도 나는 또 다른 나의 모자란 점을 찾기 바빴다.
신기한 것은 지금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지금의 나는 창의적이고 전략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는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들이 있었다. 나의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드러내고, 허술한 나를 인정하게 되면서 오히려 새로운 발상도 잘하게 되었고 일에 대한 확신감도 더 많이 들었다. 그렇게 나를 마주할 용기가 있을 때 우리는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집중하여 고민하고 매달려서 자기다움을 찾는 일, 바로 그러한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나의 허점을 많이 알아차려서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 알게 되었을 때만 그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서툰 모습을 인정하기 시작하니, 점점 그 상처가 흐려졌다. 나중에는 오히려 더욱더 가벼운 해방감이 느껴져서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들을 보낸 지금은 자유롭게 발상하고 실행하면서 나의 창조성을 더욱 믿게 되였다.
우리는 우리의 장점 때문에 빛나기보다는 빛나는 결핍의 별자리를 온전히 인정하고 결핍을 끌어안고 용감하게 세상으로 걸어 나왔기에 더욱더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 콤플렉스가 놓여있는 그 자리, 그 자리는 아픔보다 알아차려주는 빛으로 꿈틀거리는 치유의 스팟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도 살아나갈 동력을 얻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