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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Jul 04. 2024

고통의 중심에는 '나' 가 있다.

'화'를 다스리는 핵심

고통의 중심에는 '나' 가 있다.


과거의 상처, 인식의 오류, 고정관념에 묶여

저항하느라

지금 이 순간을 보지 못하고 고통받는 내가 있다.


책, 오두막


[오두막]* 에서 신(神)은

자신의 고통만 볼 땐

나(신)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영화, 오두막 / * 이하 캡쳐한 부분은 영화[오두막]이 출처임을 밝힙니다.


마음속 환상에 갇혀 추락하는 주인공에게

영화 속 예수는 마음속 고통을 보지 말고

나(예수)를 똑바로 보라 한다.


마음이 만든 고통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한다.


보는 것!

이것이 '화'를 다스리는 핵심이다.


자극을 받으면 반응이 생기고

이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듯하지만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비집고 들어가 보는 것.


'아, 이것은 화구나'

'나는 이것을 몹시도 싫어하는구나.'


볼 수 있으면

선택할 수 있다.

지켜보며 기다릴 수 있다.


순간적으로 화가 솟더라도

그 안에 푹 빠지는 것과

분노를 '인식'할 수 있음은 큰 차이다.



신을 인정하는 종교에서는

'신의 통로'라는 말을 한다.


삶을 사는 나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 라 한다.

* 청지기: 주인(소유권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신이 살아간다.


신이 나오지 않는 종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이야기한다.


고정불변의 '나'는 없으며,

전체로서의 나를 인식할 때

세상은 그대로 완전해진다.


도가에서는 무위(無爲)*의 삶을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라 하였다.


*무위(無爲)는 인식의 오류로 말미암아 혼란해진 자기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방법이며, 동시에 세상을 다스리는 법술이다. - 문학비평용어사전



리는 살면서 저항거리를 만든다.


그것은 과거의 특정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상황은 객관적이다.

하지만 판단은 주관적이다.


나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상대에겐 고통일 수 있으며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님에도,

통제할 수 없음이 당연한데도


내 맘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며

악이라 믿는 것에 분노한다.


혐오하는 것에 저항하고

갈망하는 것에 집착하며

순수에서 멀어져 고통받는다.


저항이 없는 상태가

평화로운 상태다.


한 번에 되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저항을 줄여야 하며

적어도 저항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 '화'에 관한 책을 준비하며 정리 중인 내용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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