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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성 May 02. 2021

편안히 읽을 단편 .. ​

<석양이 질 무렵>


 <석양이 질 무렵 >        

    

*     

동준은 바(bar)에 앉아 마티니로 조금씩 입술을 축이며 긴장감을 달래면서 애써 마음을 추 스리고 있었다.

술잔 안에 들어있는 올리브를 마지막에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 것을 그는 좋아했다.

짭조름한 올리브에 듬뿍 베인 마티니 특유의 풍미가 더해져 입안에서 그윽한 맛을 내기 때문이었다.

술과 피 냄새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즈음, 카페 밀'密'의 여주인 묘희가 애플 마티니를 세잔째 마시고 있었다.

별로 말이 없으면서 가끔 던지는 말이 무게감 있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동준은 술에 절어 가는 여자보다는 차라리 담배를 피며 여유로운 여자가 더 멋스럽고 편안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의 취해서 가끔 흐트러지는 모양과 그녀와의 간격사이 침묵의 공간을 지켜보다가 건조한 눈빛으로 마치 음산한 흉가를 연상케 하는 어둡고 칙칙한 색상의  벽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정을 조금 남겨 둔 시간 이었다.

수하들을 데리고 곧 오거리파의 보스인 대길을 처리하러 가야할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세상은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거야. 그 줄을 잡아야 세상의 힘을 가질 수 있지.너처럼 낭만주의는 이제 끝난 지가 오래야.”

“형님, 저는 그런 세상이 서글프고 답답합니다.”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정情 보다는 그것들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지. 그나저나 대길이를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해. 명줄은 남겨 놓되 재기불능이 되도록 여지를 남기지 말고 .. 알겠나?

대길이만 없으면 한국관을 비롯해 이 지역은 완전히 우리들 차지이니까. “

“알겠습니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속한 대명파의 보스인 준표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동준은 마치 애써 만들어 놓은 모래성이 파도의 물살에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그런 허전함을 느꼈다.    

동준은 심호흡을 하며 준표를 처음 만나게 된 인연을 어떤 의식을 치루 듯 잡시 떠올려 보았다.

준표와의 인연은 동준이 검도도장의 사범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늦은 밤 시간 귀가 길에 우연히 그들 무리의 패싸움에 휘말리면서 엮어지게 된 것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태로 구석으로 몰리어가는 무리를 보고 동준이 몸을 던져 봉 하나로 십 수 명을 순식간에 제압을 하여 준표와 그 수하들을 구해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준표는 수시로 동준을 찾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혼자 사는 동준의 살림이나 생활을 보살펴 주며 정을 쌓아오다가 마침내 대명파의 보스 준표의 오른 팔로 그를 자리 잡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동준은 잠시 후 운명적 만남을 앞 둔 대길을 또한 떠올려 보았다.

그의 기억에 가득 채워오는 대길의 이미지는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선량한 눈매와 대조적으로 투박하고 강한 억양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정情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사나이였다.

대길의 조직은 비록 작았지만 결속력이 대단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묶어 놓았는지 참으로 궁금했지만 나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오래전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의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와의 대화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살아 있었고 충성도 역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수시로 조직원들을 교육하고 단속해야하는 대명파와는 뭔가 바탕 색 부터가 달랐다.

대명 파는 돈과 이익에 좌지우지 되는 그러한 분위기가 팽배 했기에 가끔은 서로를 경계를 해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를 좀 더 알고 싶었지만 운명의 순간이 원하지 않게 너무 빨리 와버린 것이었다.

이젠 그를 맞닥뜨려 제거 하든가 불구자로 만들어 이 바닥에서는 행세를 못하게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 동준이 해야 할 이었다.    

아우들에게 만일을 위해 휴대하기 편한 작은 장비를 챙기게 하고 동준은 단번에 뼈라도 뚫어 버릴 듯 날이 잘 다듬어진 회칼을 신문지에 말아서 품에 깊숙이 질러 넣었다.

대길이 혼자가 되는 그의 아파트 쪽문 입구에 아우들을 배치하고 길목을 잡고 조명등이 고장이 난듯, 어둠침침한 한 곳에 몸을 숨겼다.

새벽 1시가 가까워 오자 동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대면의 순간이 다가 올수록 평소 그답지 않게 마음이 혼란스럽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준표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멀리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언덕 탓 이였는지 밤하늘을 한번 휘젓듯이 선회를 하고 아파트 입구를 비추는 듯하다가 멈추었다.  드디어 비운의 장소로 대길일행이 들어서고 있었다.

얼핏 대길의 오른팔 달수의 모습이 윤곽으로 비춰졌다가 허리 깊은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대길을 내려준 자동차는 이제 모퉁이 담벼락을 돌아서 보이지 않았다.

행동개시의 시간이 된 것이었다.

동준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대길의 앞을 가로 막았으며 대길의 주춤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칼을 뽑아 그의 복부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뱃살 탓인지 들어가는 칼의 느낌이 둔했다.

다시 빼내서 두 번째 칼질을 하였다.

대길은 맥없이 쓰러졌다. 팔을 휘저으며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넘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헐떡거림에 지나지 않은 소리였을 뿐 이였다.

동준이 단검에 묻은 피를 닦는 동안 동행한 독사라 불리는 재준은 못내 불안한 듯 신음하는 사내를 살피며 다시 칼을 뽑았다.
  "그만둬, 세상 떠나기 전 마지막 정리할 시간은 줘야지 .. 오거리 파 애들 몰려오기 전 여길 뜨자고..."
 동준이 그를 제지하며 차분히 자리를 뜨길 재촉했다.
 기습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져야 한다.

상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선 무리들 중 상징성을 가진 보스나,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행동 책만 제거하면 그 조직은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 할뿐이다.
 그 다음은 조용히 각개격파로 쓸어버리면 일이 끝난다.
  "어이! 불나비, 네 한칼에 저리 맥없이 무너지는 대길이를 보니 오거리파도 별 것 아닌데.."
 그렇다. 동준은 불나비로 불리는 칼 잽이었다.
 어쩌면 죽기 살기를 잊은 채 불속으로 뛰어드는 근성을 가진 불나비,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어쩌면 그런 상황일수도 있으리라.
 어둠속, 주변을 살피며 대기 중이던 아우들에게 떠나자고 눈짓을 던졌다.
 긴장한 아우들이 희미한 가로등을 벗어나기에 마음이 급했는지 걸음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떠난 후 대길은 상처부위를 손으로 누르고 누군가가 올 때까지 지혈을 하며 버텨야 했다.

통증이 호흡을 할 때마다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맥없이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휴대용 전화기를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힘이 풀린 그의 손아귀가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를 않았다.

불나비 동준이 귓가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던 말을 되뇌어 보며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숨결을 가다듬으며 전화기 버튼을 어렵게 눌렀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틈으로 경찰 순찰차의 경광등이 붉고 푸르게 교차 되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현실과 또 다른 세상이 동시에 대길의 주변에 펼쳐지는 듯 했다.

급하게 서둘렀지만 체계가 정연한 구급요원들의 손길과 움직임에 따라 대길은 들것에 실려지고, 구급차는 옮겨진 대길의 복잡한 생각과는 무관하게 심야의 산업도로를 질주하며 번쩍이는 불빛과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더욱 탄력을 받는 듯 속도를 내었다.    

동준 일행은 평소와는 달리 중요한 회합이 있을 때는 늘 카페 ‘밀’로 갔었다.  

묘희라고 불리는 여주인이 운영하는 꾀 품격을 갖춘 유명한 곳이었다.

그녀는 가녀린 여자이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다루는 능력이 뛰어 났고 험한 뒷골목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잘 받아들였다. 눈 꼬리가 약간 치켜진 탓으로 매서움도 보였지만 실은 정확하고, 거듭 볼수록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를 가진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불나비! 출장 건은 잘 해결하고 온 거야?”

전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 해 보이는 동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유별나게 반짝였다.

“예, 누님 별 탈 없이 정리 하고 왔습니다.”

동준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허공으로 흘리듯 슬그머니 피하며 조용히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마음과는 다르게 사무적으로 대꾸를 하였다.

“준표씨가 몇 달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어. 따로 연락을 취할 때까지 편안히 지내고 있으라고 하던데.. 준비는 해뒀으니 갈 때 챙겨 가도록해.”

바텐드 너머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듯 불룩한 검정색 가죽 가방 하나가 묵직한 침묵과 함께 놓여 있었다.

포근하면서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하는 묘희의 음성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대길은 혼미한 의식 속에서 불나비의 칼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손잡이에 튼튼하게 감겨진 검정색 천, 날이 예리한 칼끝의 섬뜩한 기운, 그리고 불나비, 동준이 그에게 남긴 속삭이는 듯한 모양의 몇 마디, “형님, 그냥 계십시오.”

그 다음은 복부 깊숙이 스며드는 쓰라리고 차가웠던 예리한 금속의 느낌, 그 모든 것은 각 각 따로 가 아닌 하나의 호흡이었다.

그러면서 줄곧 불나비의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칼놀림, 그리고 무엇인가 간절히 전하려는 눈빛 ...

그 눈빛은 무척 무더웠던 지난여름 어느 날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 약간은 취해 세상과 인간들에 대해 얘기하던 그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대길은 그의 칼끝이 왜 부드러웠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 이 가는 듯했다. 표면적으로는 적으로써의 길을 가는 아우였지만, 그 눈빛은 당장은 말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담은 암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대길은 우선 몸을 추 스리고 조직을 정비하면서 기다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지으며 점점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구급차가 병원의 입구 근처 응급실 앞에 멈추었을 때 출혈이 심했던 대길은 의식을 잃었다.    

*

심야 지하철...

규칙적으로 덜커덩거리는 의자의 흔들림을 타고 달수는 졸려 눈이 감기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해 있었다.

간간이 떠지는 눈으로 비춰지는 시야의 상들이 흐릿하게 오락가락 하는 것 마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보여 지는 한 남자, 또 한 여자, 그리고 또 여자들,

여자들은 치마가 너무 짧았다. 조심한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속옷이 가끔씩 보여 졌다.

달수는 요즘 여자들의 치마, 그 길이의 의미가 문득 궁금해졌다.

잠간 잠속으로 빠졌다가 눈을 다시 뜰 즈음, 한 남자가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깊게 패인 팔자주름과 희끗희끗하게 퇴색된 머리 결, 그리고 아무 작정 없이 풀어진 동공을 가진 자. 그 남자가 떠난 빈자리에 남은 체온이 이야기처럼 풀어져 잔상으로 머무르는 것이 마치 보이는 듯 했다.

참았던 잠이 스물 스물 뱀처럼 발바닥부터 몸통으로 기어오르는 느낌이 아늑한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고 생각하며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호흡도 무게 있게 느려짐을 의식하며, 혹독한 이 세상에 저항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한 한 사내의 떠난 뒷모습 과 내숭으로 치장하고 교태를 숨기며 도도하게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번갈아 떠올리며 마침내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덜커덩 거리는 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의자와 호흡을 함께 하며 천근만근의 열차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내린 텅 빈 지하철의 차량 한 켠 에서 침침한 조명아래 달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윤아 의 행복하게만 보이는 발걸음으로 덩실거리는 뒷모습이 너무 포근하고 생생하여 그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불렀다.

“윤아야!”

너무 크게 지른 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깬 것이다.

“이제 내 곁에 없는데 ...”

혼자 중얼 거리며 꿈같았던 환상에서 내동댕이쳐 버려진 듯이 깨어났다.  

윤아는 달수의 유일한 혈육 이었기에 그 아이가 없어진 지금의 달수는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잔인 하리 만큼 독하게 세상을 원망 하고 있었다.

몇 달 전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떠나는 동생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난 뒤,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운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종된 동생 일행에 대한 정부 당국의 대응이라든가 사후 조처가 너무나 형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에 대해 그는 지금 더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일 방송에서 동생일행의 사고내용과 정부의 대응행태에 대한 분분한 보도를 바라볼 때 마다 절망을 거듭하며 달수는 변해 가고 있었다.     

*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 지수는 알 수가 없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칸이 꽤 길게 이어진 듯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멀리에서 간간히 들려 왔을 뿐,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곳은 어디일까? 지수를 끌고 온 그 사내의 목적은 무엇일까?

지수는 남은 기력으로 모든 생각을 조각 맞추듯 끌어 모아 보려 안간 힘을 쏟았다.

그 남자가 부유한 그녀의 집안, 잘나가는 국회의원인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경쟁자나 어떤 피해자가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스토커의 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잔인한 수법이라고 느껴졌다. 살아 나갈 수는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에 골똘하며 탈출구를 찾아보려 안간 힘을 쏟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들은 뿌연 연기처럼 흩어지며 깊은 무기력에 다시 빠지고 말았다.

심한 갈증으로 지수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의 신음소리 같은 말을 내 뱉았다.

 "물... 물 좀 주세요.."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기척이 없는 주변이었다.

그렇게 본능적인 몸부림을 치다가 지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손은 뒤로하여 적당한 굵기의 노끈에 단단히 묶여 시골학교에나 있을 법한 나무 의자에 앉혀져 마치 그것과 하나가 된 듯 머리가 수그러진 채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실내는 낡은 유리 창문을 통해서 겨우 빛이 새어들어 올 정도였지만 그마저 먼지가 잔득 끼어 마치 해가 서쪽 산 너머로 기웃거리는 저녁 무렵의 어둑함 같은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수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이곳에 오기까지의 상황들을 꿈처럼 되살려 보고 있었다.

떠오르는 것은 그저 한적한 이곳의 암울함 같은 자신의 절망 밖에 없었다.    

*    

한마음병원 입원실 병동의 특실에 자리를 보존하고 회복중인 대길의 침상 주변에는 달수를 비롯하여 조직원 두 명과 병실입구에 세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원은 마치 신음이라도 하듯 온통 묵직한 백색으로 물들어 져 있었다.

세상의 리듬에서 소외된 이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또 다른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세상 사람들의 반 정도의 의식과 반 정도의 움직임을 통해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대길이 잠에서 깨어나자 달수는 긴장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 판단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대길의 말을 기다리며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달수, 난 괜찮으니 걱정 할 것 없다. 칼이 급소를 빗나가 지나갔을 뿐이야.”

“형님, 어느 쪽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뻔하지. 준표의 대명 파 소행이 아니겠나? 늘 우리를 눈에 가시처럼 여겨 왔으니... 이런 비열한 습격을 할 놈이 준표 말고는 누가 있겠는가? 그놈, 국회위원, 지방검사, 형사 나부랭이들하고 줄 대며 온갖 비열한 짓 꺼리는 다하는 놈 아닌가?“

“예, 저도 짐작은 대충 했지만 이렇게 겁 없이 행동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하고 보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달수! 한 가지 은밀하게 진행해야 할 것이 있다.”

“지시 하십시오. 형님!”

“대명 파 쪽의 불나비를 따라 붙어. 그리고 조용히 은신처를 알아 오너라.”

“지시하신대로 불나비를 조용히 추적 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절대 험하게 건드리지 말고, 다치게도 하지 말고, 불상사는 없어야 된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말씀대로 그냥 조용히 소재 파악만 하면서 지켜보고만 있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별도로 지시가 있을 때 까지 찾기만 하고 가만히 놔두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됐다. 너희들은 이제 가서 쉬도록 해라. 난 생각을 좀 정리해 봐야겠다.”    

아우들을 물리고 대길은 그날 밤의 정황들을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불나비라고 불리는 동준과 같은 칼잡이가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는 것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수가 아닐 것이라고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단칼에 급소를 골라서 헤집을 수도 있었을 텐 데 두 번의 칼질이 모두 가벼운 상처로 끝나게 둔 것도 그랬다.

그리고 동준의 그날 마주친 눈빛은 살의라든가 적의 같은 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냥 형에게 안부를 전하는 다정한 눈 빛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길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암시를 준 것이란 말인가?    

다음 날, 날이 밝은 후 지역구 김 의원의 보좌관 김태식이 병문안을 왔다.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벌리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 속에서 가식이 눈에 보였다.

“대길, 몸은 괜찮은가?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겼는가?”

“태식이 형님 아니십니까? 공사가 다망 하신분이 이런데 까지 행차를 다 하시고? ...”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김태식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의외라고 대길은 생각이 들었다.

대길은 그의 눈매를 흘끔 살폈다.

뭔가 불안정하고 자신감이 결여된 시선이었다.

김태식은 내심 대명파의 준표 무리에 붙어 대길의 오거리 파에게는 냉소 적 이었기에 분위기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모시는 김 의원의 행방불명 된 딸, 지수의 소재를 알아내야 했기에,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을 어찌 하랴는 심산으로 김태식은 더욱 뻔뻔함을 갖기로 작심을 한 듯,

그만의 야비한 눈빛을 진심 걱정해주는 척 바꾼 채 말을 이어갔다.

“자네 걱정도 되고, 안부도 궁금하고, 또 지역구 김 의원님 따님이 행방불명 된지 몇 일째여서 거기에 대한 정보도 얻고 싶고 해서 왔네.”

“요즘 조선족들이 하는 장기밀매 단이라 하던가? 뭔가가 많이 설친다던데 혹 그 쪽으로 잘못 된 것 아닙니까?”

“그 쪽은 아는 애들 통해서 알아 봤는데. 아닌 것 같아. 누군가 원한 관계로 납치 해두고 아직 연락을 취하지 않는 듯하다네.”    

“학생들 수학여행 가다가 배가 뒤집히고 수 백 명이 죽었다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의원 나리가 자기 딸 하나 어떻게 되고나니 야단 법석 이군요. 자기 새끼만 중한가? 그 참 ... ”

대길의 힘이 들어간 그 말에도 태식은 전혀 무감각한 반응으로 말을 이어갔다.

“집히는 데가 있으면 수소문해서 요구 사항이나 풀어 낼 방도를 좀 알아 봐주게. 의원님께서 뭐든지 수용하겠다고 하더군..”

“정말로 돈 있고 권력이 있어야 자식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인가 보군요?  이런 세상이 그저 허무 합니다. 그러나저러나 그 의원 나리, 이번사고 수습 대책 위원 맡았다고 하던데 ... ? 아마도 유족들 마음을 지금이라도 조금은 이해를 했겠군요. 제 마음은 그런 잘난 국회의원 일엘랑 관심 끊고 싶습니다. 속도 끓여보고 자식도 한번 잃어 봐야 세상이 어려운줄 알지요!  지랄 같은 놈들 ...”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아무튼, 부탁 하네. 자네 수하들의 정보력을 믿네, 다른 쪽 애들이나 경찰은 도무지 제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대책이 안 선다네.”

다시 한 번 비굴한 미소를 담아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보좌관 김태식은 그렇게 병실을 떠났다.

대길은 앞으로 자신에 대한 이번습격의 대처라든가, 조직의 행보에 대한 대책에 대해 생각에 깊이 잠겼다.

김태식의 당부는 별 관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잘나고, 잘살고, 매사 똑똑한 그네들이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으며 관심을 끊고 싶었던 것이었다.

병실 바깥의 정원에는 낙엽이 다 떨어져 나간 황량한 늦가을의 쌀쌀함이 보여 지는 것이 그 색채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    

하루 종일 산속을 헤매다가 묵직해진 다리를 쉬게 하려 암자의 방문을 열어 제기고 툇마루 가까이로 다가서니 한풀 죽은 라일락향이 은은히 코끝을 통해 머릿속을 가득히 물들이는 안도의 순간을 맛볼 수 있었다.

길고 곧게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석양의 붉은 빛이 나무들의 틈새를 빠져 나오느라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길게 마당으로, 그의 심장으로 비수가 꽂히듯 내려 비춰지는 강렬한 석양의 빛깔이 눈 부셨다.

아 !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강물을 타고 흐르다가 순간 멈춤으로 감각을 찾아보는 이 순간..

묵직한 무게감과 둔탁한 충격이 나의 사고영역을 가볍게 툭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산속 생활을 한지도 벌써 두 계절 째를 접어들고 있었다.

익숙해져버린 생활들이 이제는 동준에게 깊은 자국을 남긴 듯, 떠난다는 게 어색한 결심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석양을 오롯이 온몸으로 맞아들이고 싶어 마당가운데로 내려서서 발을 벌리고 두 팔을 마음 것 펼치며 기지개를 켰다. 이내 마음이 상쾌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무도, 마당의 흙도, 자그마한 산속의 암자도, 동준도 모두 붉게 물들어 이승과는 또 다른 세상이 만들어진 듯한 고즈넉한 산골의 아늑함이 암자의 입구 비탈길에 누군가의 출현으로 산만해졌다.    

“아니! 대길이 형님 아니십니까?”

동준은 내심 뜻밖에 벌어진 이 상황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뻔 했다.

“불나비 아우! 오랜만이네. 하하하.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놀랐는가?”

대길의 편안한 인사말에 나름 그 이후의 일을 짐작으로 헤아려 보면서 평상심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어쩌면 제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둘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가볍게 오랜만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름 모를 산새소리들을 배경으로 둘은 어색함을 풀어내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지며 잠시의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이미 어둠살이 지는 것을 봐서는 대길은 아예 하룻밤 묵을 것을 작정하고 온 듯하였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동준은 산골 밥상을 내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마을 어귀 차인이 만들어 준 ‘목통 차’와 ‘귀감 차’를 내어와 정성 것 우려냈다.

술을 멀리 한지도 오래 되었고, 지금 시간에 마을 어귀 까지 술을 사러 간다는 것도 성가시고 하여 대길의 의향은 물어 보지 않고 그냥 늘 하던 대로 차를 내온 것이었다.

대길도 차를 좋아 하는 듯해서 동준은 흐뭇한 마음으로 찻잔에 맑은 소리가 투명하도록 정성스럽게 가득 잔을 채웠다.

투박하였고 찻잔으로 조금 커 보이는 학이 날아가는 문양이 그려진 잿빛의 도자기 잔이었다.

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차고가 구름처럼 차의 수면 위를 번지고 있었으며,

그윽한 향이 두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며 몹시도 평화로운 정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랜만의 재회와 더불어 많은 사연을 주고받아야 했고, 풀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밤이라도 지새울 작정이었다.    

“아우! 내가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니 아우가 날 살려 냈더군 ...”

“ .... ”

대길이의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동준은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침묵으로 수긍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그랬는가?”

“형님, 저는 명령을 받고 분명 머리로는 형님을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 했지만, 형님을 막상 앞에 두고 칼을 드니까, 제 가슴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많이 힘들었겠다고 생각은 하네. 내 쪽으로 올 텐가? 대명 파는 이제 완전 와해되었네.”

“아닙니다. 저는 이번 일을 기회로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형님 일은 잘 수습 된 것 같아 퍽 다행입니다.”

“불나비, 자네가 길을 터 준 것이지. 대명파와 우리 오거리 파는 어차피 양립 할 수 없었던 운명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준표가 자네를 복귀 시키려고 했을 때 자네가 오지 않은 것이 또한 우리를 도왔네. 자네가 없는 대명 파는 오합지졸이었고 내분까지 일어나서 내가 일 처리 하기가 한결 쉬웠다네. 만일 자네가 돌아와서 준표를  도왔다면 이렇게 일이 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 안다네.”

“형님 같은 분이 조직을 잘 추스르시고 지역 상인들과도 협조 하며 아우들과 우애 있게 잘 지내신다면 더 바랄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형님의 인품을 믿습니다. 준표 형님은 혈기만 있었지 형님처럼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정이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지를 아쉽게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맙네,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게. 내가 기다리겠네.”    

동준은 대길과 그렇게 그간의 쌓인 얘기들과 아우들의 근황, 지역의 크고 작은 대소사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새벽이 뿌옇게 밝아 올 때 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대길이 잠드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붙였다.    

새벽녘에는 산에서는 새소리가 맑고 다양한 종류로 활발했다. 새소리와 함께 대길이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는 화장실을 제대로 찾아야 할 텐데 라고 생각 하다가 동준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동공 가득 파고드는 햇살이 너무 부셔 눈을 떴다. 작게 난 동창으로 쏟아져 들어 온 햇살이 길게 빛줄기를 이루어 동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던 시간은 이미 아침이 늦은 때였다.

머리맡에는 두툼한 흰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고 대길은 떠나고 없었다.   

동준은 햇살이 맑아서 투명한 세상에 서있는 듯 그러한 느낌에 몰입하며 불어오는 상긋한 편백나무와 소나무의 향기를  아낌없이 들이 쉬며 그윽한 몸짓으로 그만의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을 진행 하였다.

기천문의 ‘육합 단공 법’은 동작이 무게감이 있으면서 부드럽고 깊다.

옅은 태양의 빛을 받으며 행하는 행공법인 ‘육합단공 법’은 신선의 움직임이나 다름없게 동준에게는 받아 들여졌었다.

행공이후에 찾아오는 평화로움이 동준은 요즘 살아가는 이유이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산속에서의 홀로의 생활이 충만 했던 이유는 바로 그 것이었다.

마치 고요를 듣고 있는 듯, 정지 되어 버린 시간의 느낌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시간을 훔쳐가는 세월에 맞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오는 느낌이 있다면 또한 이런 것이리라.

어쩌면 시간은 인간들이 소홀히 여기며 잊고 살아가는 정情과도 같은 것 일거라고 동준은 생각을 정리 해보았다.

아마 그것이 분명 할 것이다.

하루가 천태만상으로 흘러가고 석양이 짙어 질 무렵 모든 것은 제 나름으로 정돈이 된다. 그리곤 칠흑의 밤 같은 침묵을 지내면서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맑은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고, 온몸으로 받으며 새로운 시간을 얻고서 또 하루를 모두가 시작을 하는 것이다.    

산속 생활을 마무리하고 세상으로 다시 나가면 준표와 대길, 그리고 동준의 관계를 명확히 정리를 해준 카페‘密’의 여인, 묘희를 찾으리라 그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 그리움만큼 햇살이 강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산등성이를 따라 온 세상을 물 들였던 석양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동준의 입가에는 스쳐가는 바람의 부드러움만큼 고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오만불손하던 김 의원의 딸은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몇 달 만에 정신이 온전치 않은 채 바닷가 선착장 술집 작부로 있는 것이 발견되어, 집으로 데려 갔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이 나라가 싫어졌다고 체념을 섞어 말해오던 대길의 오른 팔인 달수는 홀연히 중남미의 어느 나라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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