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mmy, come, come, come!”
처음 호주에 도착했을 때, 영어로 쓰여진 각종 표지판들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통이 트였다. 여기 오기 전 10년간 30개도 넘는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지만, 유럽 여행 중 2박 3일 머물렀던 영국을 제외하곤 영어권 나라를 간 적이 없었다. 빨랫줄에 걸려있는 혹은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음도 뜻도 모르는 글자들이 빼곡한 표지판 앞에서, 늘 길을 잃고 또 길을 찾는 방황을 했었다. 그러다 현재까지 내 여행의 마지막 정거장인 호주에 와서 영어 표지판들을 읽어보며, 나는 갑자기 눈을 뜬 장님처럼 어쩌면 여기서는 오래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착각은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시키면서 무너졌다. 커피 주문을 받는 카페 직원은 내 ‘cappuccino’ 발음을 3번 만에 알아들었고, 잠시 후 민망함으로 가득 찬 카푸치노 한 잔을 받아 들며 내가 고맙다고 말하자 직원은 “No worries!”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 영어 발음을 걱정하지 말라는 건가? 내 발음이 그렇게 웃겼나? 왜 자꾸 웃는 거야?’ 착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괜히 친절한 직원에게 짜증까지 났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No worries’라는 말은 ‘괜찮아요’, ‘천만에요’ 뜻의 호주식 표현이었고, 호주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잘 웃었다.
호주에서 아이를 낳고 진짜 아기처럼 영어를 배우고 있다. 그 시작은 쉬 pee와 응가 poo, 태어나서 말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집에서 엄마로부터 수백번 수천번 듣는 말, 어떤 말보다 중요한 이 두 단어는 한국 교과서에도 토익책에도 없었다. 진짜 real 영어는 점점 더 적나라하고 더러워졌다. 트림 burp, 방귀 fart, 구토 vomit, 설사 diarrhea, 잘 먹고 잘 싸는 일이 가장 중요한 젖먹이 시절, 장이 보내오는 저 신호들은 엄마가 꼭 알아야 할 영단어가 되었다. 아이의 장 운동이 원활하지 않을 때 엄마는 의사를 찾아가 이 원초적 영단어들을 반복 또 반복하는 학습을 해야했다.
누워서 장 운동만 하던 젖먹이가 배밀이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가게 된 동네 플레이 그룹. 그곳에서 엄마는 또 훈계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잘했어 (Good job!), 상냥하게 굴어야지 (Be gentle), 친구랑 같이 갖고 놀아야지 (Share with your friend), 고맙다고 말하렴 (Say Ta!). 그리고 엄마들의 한숨 섞인 ‘이노무 똥강아지!’ 같은 말들 naughty (버릇없는), cheeky (까부는), fussy (까탈스러운) 같은 육아 실전 형용사들을 단순히 하나의 뜻으로 아는게 아니라, 확실히 어떤 느낌인지 절로 체감하며 습득하게 되었다. 참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육아를 하며 말이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서 엄마 영어는 놀이터로 확장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 기구에 우리 아이가 올라타려고 달려든다. 그 기구를 돌리고 있던 엄마가 속도를 줄여주며 “너도 탈래?” 하고 물을 때, ‘hop on’ 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을 여기서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아이가 미끄럼틀 위에 앉아서 내려오려고 준비를 할 때는 “Ready, Set, Go!” 하면서 응원을 해줘야 한다는 것도, 놀이터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구는 ‘merry go round’ 매달려서 날아가는 그네 이름은 ‘flying fox’, 철봉으로 된 정글짐은 ‘monkey bar’라고 부른다는 사실들도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이제 6개월 정도 이곳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아이가,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나를 보면서 “Mummy, come, come, come!”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이를 따라가면서,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셔요’ 노래가 떠올랐다. 세 돌 가까이 엄마랑 집에 있다 보니 호주에 살아도 한국어밖에 모르던 아이였는데, 이제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꾸 영어를 접하는 것이다. 놀이터에서 빙글이를 밀어줄 때면 “faster!”라고 외치고, 그네를 밀어줄 때는 “higher!”라고 외치는 아이, 그렇게 이제 아이의 영어는 더 빨리 더 높게 자랄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엄마는 슬슬 아이의 그런 성장이 조금 두렵다. 나는 평생 이곳에 살아도 아이처럼 영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빨리 뛰어가는 내 아이가 멀어질까봐, 높이 날아가는 아이를 언젠가 내가 붙잡지 못하게 될까봐, 훗날 아이가 엄마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될까봐. 그래서 아이와 동네 플레이 그룹에도 가고, 놀이터에 나가 아이처럼 뛰고 놀며 영어를 몸소 더 가까이 느끼며 배우려 한다. 아이의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엄마도 영어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아이처럼 꿈을 꾸어 본다. 아이를 통해서 다시 처음부터 영어를 배우는 중이다.
“Mummy, come, come, come!”
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엄마는 아이를 따라가 본다. 비록 아이처럼 빨리 배우고 네이티브 발음을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No worries!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배우는 엄마의 영어는 서툴게 엉금엉금!
그러나 아이의 손을 잡고 계속 함께 나아가다 보면 엄마 영어도 아이를 따라 쑥쑥 자라나겠지. 아이와 발을 묶고 하는 2인 3각 영어 놀이, 이 시간들 또한 열심히 기록하면서. 자, 지금부터 Ready, Set,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