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회사에서 나름 인정도 받으며 고만고만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덜컥 내 이름 석자로 사업자를 냈다.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잃을 것도 없었던 그때, 청춘의 열정은 뜨거웠고 용기와 배짱은 두둑했다. 종목은 여행업, 짜릿한 모험을 하리라, 신나는 항해를 하리라, 여행처럼 인생을 살으리라. 내 인생의 선장으로 살던 시절이었다. 사업자를 낸 지 꼭 일 년 만에 온갖 풍파를 맞고 결국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이란으로 비즈니스이자 효도 관광차 모시고 간 아버지가 일주일 만에 쓰러졌고, 그 뒤에는 나만 믿고 따라온 14명의 손님들과 남은 일정 2주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음 여행 때는, 출발 일주일 전 손님들 비자가 다 나왔는데 내 비자만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찌어찌 손님들만 보낸 겨울 여행, 이란에 몇십 년 만에 내린 폭설로 항공이 지연되어 하마터면 손님들을 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만들뻔했다. 그리고 또 다음 여행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영등포구청에 가서 사업자 취소를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버지 집에 돌아와 천장만 보고 누워있었다. 한동안 집에서 아버지 산소까지 왕복 20km 길을 날마다 걸어 다녔다. 멀리멀리 도망을 가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만으로 서른을 넘기기 전에는 별 조건 없이 길게 비자를 내어준다는 호주 워킹 홀리데이 막차를 탔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시간을 건너기에 비자 기간 일 년은 길고도 긴 시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여기에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여기서 살기로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말이다. 약속한 일 년이 지나고 이곳에서의 시간을 더 연장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은 이곳의 혼인법으로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나, 이민법으로는 다소 복잡 다난한 상황과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남편은 이란에서 온 난민이었다.
난민 -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 망명자.
남편은 자신을 보호해줄 새로운 안식처, 정치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호주에 왔다. 나고 자란 조국과 가족을 등지고, 인도네시아에서부터 배를 타고 목숨을 건 항해 끝에 호주에 왔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안전, 보호, 자유, 희망 같은 것들을 이곳에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임시 비자 (temporary visa)라는 조건을 달고 있었다. 언제 갑자기 이곳에서 추방이 될지, 난민 수용소로 다시 보내질지 모를뿐더러, 이곳의 법으로 합법적으로 결혼을 해도 같은 비자 아래 배우자를 묶을 수 없었다.
호주에서 결혼식을 한 우리는 영어로 혼인 서약을 했다. I promise to love you, to care for you and to respect you for all of my life.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돌보고, 내 평생 동안 당신을 존중할 것을 약속합니다.) 평생을 건 어마 무시한 약속을 하면서도 나는 남편의 이민 신분과 임시 비자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서의 내 시간을 더 연장하기 위한 조건으로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배움보다는 체류의 목적으로 돈을 주고 시간을 산 것이다.
작은 원베드룸 아파트에 세간살이는 다 어디서 공짜로 주워와 소꿉놀이하듯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때에도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잃을 것도 없었다. 사랑의 열정은 뜨거웠고 용기와 배짱도 두둑했다. ‘영주권(永住權)’이란 말이 참 우스웠다. 우리가 이 생을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어느 특정 나라에서 영원히 살 권리라니... 여전히 내 인생 선장으로 살던 시절, 마음 잘 맞는 뱃사공 친구 하나 만나서, 짜릿한 모험과 신나는 항해를 하며 여행처럼 인생을 살고 싶었다. 우리 집을 사기 전까지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