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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맘 Jul 23. 2021

영주권, 영원히 살 권리 -2-

4년 전 이맘때쯤 결혼한 지 일 년 반이 되었고 나의 첫 번째 학생비자가 끝날 무렵, 나는 만 33세 가임기 여성이었고 호주 달러로 십만 불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만 35세 이상이면 노산(고령 임신)에 해당되고, 호주 영주권 신청을 위한 나이 점수에서는 이미 5점이 깎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임신도 이민도 지금부터 준비하면 된다. 다만 그것은 갈림길,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내 비자 수속을 도와주던 에이전시 실장님은 나에게 간호 공부를 추천하셨다. 해가 갈수록 호주 이민이 어려워지는 추세이지만, 간호사만큼은 아직도 영주권을 위한 확실한 직업군이었다. 간호학 학사를 따려면 최소 3-4년은 죽고 살기로 공부만 해야 하며 십만 불 내외로 학비도 들었다.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취업을 해서 영주권을 딸 즘에는, 아마도 마흔이 될 것이다. 실장님은 늦지 않다고 하셨다. 그분도 호주에 와서 십 년 넘게 고생해서 영주권을 따고 마흔이 넘어 아이를 낳았다.

호주에서 영주권이 있어야지
안정되고 여유롭게 아이도 낳고 기르죠.

아이를 낳고 기르며 가끔씩 그 실장님 말씀이 떠오른다. 정부로부터 기저귀 한 장 양육비 한 푼 지원받지 못하고, 하루에 십만 원이 넘는 어린이집 비용도 고스란히 우리 몫이며, 석 달마다 체류를 위한 가짜 학생비자 학비를 낼 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시시때때로 불안감이 우리를 불현듯 엄습할 때, 그때 그 실장님의 말씀과 함께 영주권의 무게를 실감한다. ‘우리가 이 생을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어느 특정 나라에서 영원히 살 권리라니...’ 하며 우스워했던 영주권을 말이다.






난민인 남편과의 결혼은 호주의 혼인법으로는 합법적인 것이지만, 이민법으로는 다소 복잡 다난한 상황과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다. 우리는 배우자이고 가족이지만, 서로를 같은 비자 아래 묶을 수가 없다. 가령 내가 호주 영주권을 따고 시민권을 취득한다 해도 마찬가지, 남편은 나와 같이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될 수 없으며, 정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호주 정부의 난민 정책 결정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4년 전 내가 두 개의 갈림길 위에서 지금의 길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래서 영주권도 없이 아이를 낳았고, 그 십만 불을 가지고 영주권 대신에 집부터 샀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애도 낳고 집도 샀는데 왜 아직도 영주권을 주지 않느냐고... 그러나 호주는 우리에게 정반대의 답을 할 것이다. 영주권도 없는 한낱 외국인 유학생과 보호 신분인 난민 주제에 왜 여기서 애를 낳고 감히 집을 샀느냐고... 우리는 아직 이곳에 터전을 잡고 정착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올해 초 나의 세 번째 학생 비자를 신청할 때, 에이전시는 나에게 최근 한국에 다녀온 날짜를 물었다. 올 추석이면 한국에 가지 않은지 만으로 5년이 되는 내게 실장님은 난감함을 표하신다. 학생 비자는 학업을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분인 만큼, 방학 때마다 자주 한국도 가고 전반적인 삶의 기반이 한국에 더 갖추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3월 3일, 드디어 남편은 호주에 와서 팔 년 가까이 기다린 난민 심사 인터뷰를 하고 왔다. 그 심사를 마치고 5년짜리 임시 비자만 받아도 아이의 어린이집 지원을 받을 수 있단 기대감에 우리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호주 이민성에서 온 메일, 우리 아이가 2중 국적자이기 때문에 난민 비자 신청 자격이 되지 않지만, 이민부 장관이 최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더 기다리라는 소식이었다.


속인주의를 따르는 호주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는 부모의 국적대로 한국과 이란 2중 국적자가 맞다. 그러나 난민인 남편은 이란에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혼인을 하고도 남편이 국적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 같은 신분증이 없어서 한국 영사관에 혼인 신고를 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도 같은 이유로 한국에 아이 출생 신고를 하지 못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아이는 2중 국적자인 동시에, 정작 그 두 나라에는 아무 기록도 없고, 호주에서 발급한 출생증명서만 가진 무국적자인 셈이다.






아이가 집 안 구석구석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남편은 새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나 나는 짐짓 그것을 모른 체하며 오히려 아이와 공모하여 같이 벽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일종의 영역표시랄까, 여기는 우리 집이니까, 우리는 꼭 오래오래 여기 우리 집에 살 거니까, 우리 마음대로 아이의 손때 묻은 그림을 막 그릴 거라고, 그렇게 나 혼자서 무언의 외침을 벽에다가 그렸다.

매일 아침 아이의 이름으로 만든 초를 켜고 조용히 기도를 드린다. 우리 가족에게 같은 비자를 달라고, 우리가 이 생을 영원히 살 수 없어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그 영주권을 좀 달라고, 이 오랜 기다림에 우리 가족 모두 너무 지치지 않게, 불현듯 찾아오는 이 막막한 불안감에 우리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밖에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도 서로를 감싸며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게 기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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