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끝났다. 재미로 시작한 게 재미가 아닌 목숨까지 건 목표가 되어 스스로 그 시험의 굴레로 밀어 넣고 심리적 가두리(이걸 끝내지 않으면 평생 여기에 갇힐 것 같은 기분)를 만들었다.
결과를 떠나 시작 전 그 널널하던 지난 일상(시간)들이 시험 덕분에 참으로 귀한 것이 었다는 뻔한 사실을 다시 몸으로 체득하게 된 것이다. 공부 중에, 퇴근 후 저녁 산책을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피곤을 달래는 커피가 아닌 여유로운 한잔, 짧은 여행이라도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또 코로나 시국에 갇혀 사는 아이들한테도 많이 미안했다.
여하튼 '시장이 반찬'이란 말이 삶에 얼마나 큰 가르침이 되는 말인지 새삼 느낀 것이다. 뭐든 생리적으로 굶어보면 모든 가치가 달라진다. 그것이 음식이든 자유든, 궁하면 커 보이는 것이다. 모든 욕구에 적용되는 원리 같은 거랄까. 결국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다.
돈의 가치 역시 만원이라는 숫자는 고정이지만 쓰는 이에 따라 그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얼마 전 피자 한판 뉴스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겐 온전히 전부가 되기도 한다.
돈!
돈과 나는 분자와 분모의 관계다. 분자가 큰 게 좋겠지만 뜻대로 되기 힘든 일이다. 노동으로 돈을 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분모인 나는, 그렇다. 내가 작아지면 된다. 그러면 값은 커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작아지는 것 역시 어렵다. 하지만 단언컨대 분자에 연연하기보다 분모인 나를 작게 만드는 능력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겠다. 그 과정이 살아가는 이유이며, 나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며 분모의 크기(돈)를 숫자적으로도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돈의 간섭을 덜 받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지 내가 경제적으로 가난 해진다는 말은 아니다.
돈과 나의 분수를 좀 더 설명해보면, 분자의 돈과 분모의 나는 아래 위로 명확히 보인다. 하지만 분수의 값을 정수로 계산해버리면 돈과 나는 사라지고 결괏값만 남게 된다. 그 숫자를 삶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이라 가정하고 범위를 정해 보면, 무한대로 크지거나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없으니 통상적인 수준의 범위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면 건강검진 결과표에서 보듯 범위의 숫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 범위에 들어간다면 그 옆 칸에 '양호(정상)'라는 글자가 보일 것이다.
행복이란 그런 거다. 그냥 그 양호의 범위에 들어가면 된다. 아무리 큰 부자도 분명 분자에 비례하는 분모를 가질 것이다. 그들도 양호의 결과가 최고의 결과일 뿐이다.
물론 저 값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양호의 범위에서도 높은 값, 낮은 값이 존재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중요한 '나'의 값이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모든 걸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 분모인 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어떤 '나'가 좋은 분모일까?
가장 먼저 드는 내 생각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이어야 외부요인에 영향을 덜 받는다. 대부분의 판단은 본인이 만든 결과이기 때문에 수용이 쉽다. 앞서 말한 돈의 간섭을 덜 받는 사람들도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이 크고 돈으로 방어할 일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역으로 말하면 이들이 부자가 될 확률도 높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불행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지로 인한 내부로부터 온다. 모르니 두려운 것이다. 맞다. 세상에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일생을 살면서 우주의 것들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고 죽겠나. 신을 찾아 내 두려움을 떠넘길 수밖에 없다.
여하튼 수동적인 삶은 늘 불행하기 마련이다. 불행하지 않고 무지하지 않으려면 늘 자아개발에 노력해야 한다. 그게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우주의 중심은 어딘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중심은 나다. 나의 자각이 없다면 내게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물리적 우주는 하나일지 몰라도 개인의 우주는 각각 하나씩 있다. 효율적이다. 신이 우주의 인구수별로 우주를 하나씩 줄 수 없으니 하나의 우주를 두고 우주인 각자가 개별 인지하는 우주로 나눠 가지게 했다. 물리적인 우주는 같지만 당신과 내 머릿속 우주는 다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인 시간은 같아도 개인의 소유 시간은 다르다. 걸어서 가는 것과 뛰어서 가는 시간이 다르고 한 시간 내 업무처리 능력도 사람마다 다르다. 서로가 소비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주를 들먹이는 이유는 내가 또는 당신이 가진 우주의 크기 때문이다. 그 크기에 따라 만물의 크기와 수용공간, 다양한 접근 공간이 좌우되기 때문이다.(언젠가 이걸 풍선에 비유한적 있는데 지금 보니 풍선보단 우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 우주의 크기가 사고의 범위, 인품과 능력을 좌우하고 그로 인해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것의 수용과 해결을 낳게 된다.
이렇게 분모의 값은 개별 우주로 확장된다.
그 값은 명기하기 어려우니 X로 둬보자.
X의 성질은 수동적일 때 작아지고 능동적일 때 커진다. X는 사고의 능력에 따르고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분명 능동적인 성질에 가깝다.
그럼 능동적인 성질의 것 들은 뭐가 있을까?
사실 다 아는 것들이다.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하며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체험하고 경험하며 글을 쓰고 대화를 하는 류의 일들이다. 바로 신이 내린 인간의 형벌?들이다.
즉, 공짜는 없다.
행복해지려면 노력해라. 행복은 저 하늘 위 뜬구름이 아니라, 네가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네가 노력하면 가지리라.
삶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명언은 없다. 그저 실천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다.
'시장이 반찬이다'. 실천이 따른다면 이것만 해도 살아가는데 충분한 명언이다. 이걸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노력하는 자, 손을 뻗는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