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른 시절을 보내고 있다.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났고, 벌써라는 말을 붙이는 일도 쉬워졌다. 벌써 월요일이고, 벌써 여름이 되었고,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다.
사람은 왜 이별을 준비할까. 오래 묵혀둔 이별은 덜 아플까. 어쩌면 아픔의 총량을 오랜 기간 동안 나눠 아픈 것 뿐이지는 않을까.
미련하게 이런 생각들을 벌써부터 하고 있다.
시골의 원칙. 고기는 신문 위에서 구울 것. 신문은 약간의 과장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다. 고기 앞에서 과거의 추억과 미래에 대한 낙관이 쉽게 부풀려지고, 신문의 성질은 다행이었다.
신문지 위에서라면 좋은 이야기를 거짓으로 진술해도 될 것만 같아.
나는 아픈 곳 없이 잘 지내요.
누군가의 열애와, 누군가의 비리와, 누군가의 사건 위에서 우리는 고기를 굽는다. 시골의 원칙이 누렇게 익어간다. 시골이라 부르는 것과도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발음했더라. 시골이었나, 아니 사골이었던가. 오래된 발음과 방언 사이의 거리감이 오래된 시골을 우려낸다.
이별이 누렇게 구워진다. 누군가의 부고 위의 우리는 이별을 알맞게 익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