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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별 Feb 24. 2021

어떤 판결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고 해도 딱히 누굴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책을 선물하고 싶을때에는 늘 로맹 가리, 그러니까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선물 했다. 선물 해놓고 재미는 있었냐, 읽을만 했냐, 라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앞의 생을 선물 하고 싶었다. '자기 앞의 생' 그 자체를. 그러니 내게는 책의 내용보다, 선물 받은 사람이 책을 보고 느꼈을 감정 보다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을 선물한 나의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챕터도 딱히 없고 쭉 훑어 봐도 도저히 읽을만한 매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 책을 나 역시 딱 한번 봤다. 왜냐면 다시 읽기에는 도저히 흥미가 생기질 않아서이다. 흥미가 안 생기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생이라는 무거운 단어는 말하기만 해도 어깨가 내려 앉는 기분이다. 얼마 전 어떤 재판에서 어떤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나는 도저히 내일을 살아낼 수 없을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옛날에, 내가 어렸을때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고 앓아누운 사람에게 속으로 코웃음 쳤던 일이 생각났다. 십수년이 지나서야 그게 이런거구나 느꼈다. 인간으로서의 무력감.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아주 사소하고 별거 아닌 미생물이 된 듯한, 나의 존재 전체를 부정당하는 기분. 이렇게 정면에서 안면을 가격당한 고통일줄 몰랐다. 나는 사회에 속해있지만 나와 사회는 아주 먼 듯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라크는 여전히 멀게 느껴지지만 권력에 의한 성범죄는 그리 동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시 자기 앞의 생으로 넘어와서,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한 번 덮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지만 그 때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리고나선 책 커버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쉰 다음 다시 책을 열어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누구나 다 아는 명작이고 명작은 대부분 교훈을 남기며 그 교훈이란 대부분 인간의 삶에 되도록 좋은 방향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이 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외계층의 삶, 그 속에서 무던한 듯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살아내는 주인공, 그걸 보는 어른들의 시선,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한테 그저 톰 소여의 모험이나 소공녀 같은 책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이 책들도 훌륭하긴 마찬가지이다.)
믿기지 않는 무죄 판결 이후 살껍질이 다 벗겨진 채 세상으로 떠밀려 나온  짐승의 기분이 되었을 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생각났다.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고 나 스스로도 나를 보호할 수 없는 비참한 무력감이 기억 속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앞으로 나아갈 힘은 나지 않았지만 집에 꽂혀있는 로맹 가리의 다른 책들을 들쳐 볼 힘은 나게 해주었다. 거기에서 또 조금씩 조금씩이다. 생에 대한 희망, 긍정의 힘 같은건 없다. 그래도 내일에 도달하려면 그 조금씩 조금씩이 간절해진다. 지금은 여기 숨어서 계속 모두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나를 조금씩 일으키는건 적당한 밥과 적당한 약, 적당한 수면 시간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들쳐보는 노력. 그것들일 것이다. 그렇게 뭔가를 들쳐보다가 가끔은 또 주저 앉기도 할테니 확신은 없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리고 몰라줬으면 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노력. 만약 일주일을 산다면 일곱번의 노력이 거기 있었을 것이다. 일곱번 마른 세수를 하고 차려지지 않는 정신을 애써 차려가며 보낸 시간들이 나의 살갗들을 자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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