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와 함께 떠날래?

6년을 만난 남자친구에게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말했다

by 하나의 세계


- 나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어.

남자친구에게 폭탄선언을 날렸다. 요 근래 내가 점점 지쳐가는 걸 알고 있었던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이해한다는 듯이 잘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고 난 후,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했는데 잘했다는 그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면서도 의아했다. 내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는 게 이렇게 간단하게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인가?


5년 6개월의 밤낮 없고 주말도 없는 치열한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는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학교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나 연애를 시작한 이후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못 견디겠다는 듯 하루 24시간을 온종일 붙어있던 우리는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가 없었다. 일 때문에 남자친구와의 약속에 늦거나 아예 약속을 취소하는 게 일상이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쉽게 잡을 수 없는 기회고 행복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줬다. 직장생활을 하는 5년 6개월 동안 그는 언제나 나를 기다렸고, 나는 항상 미안해했다.


처음 1년은 적응하고 새로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다음 1년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에 일에 나를 갈아 넣었고, 그다음 1년은 승진을 하며 바빠졌고, 그다음 1년은 한번 더 승진을 하며 아랫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해 남자친구와의 시간은 우선순위가 더 뒤로 밀렸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며 묵묵히 기다려주고, 조용히 응원해 줬다. 그는 나에게 시간을 내달라 보채지도 않고, 만나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드는 것에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점점 더 미안해지고 작아졌다. 이러다 우리의 사랑이 시들어버릴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나는 일을 줄이고 그와 시간을 더 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잘했어,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커피만 연신 들이켜고 있는데, 그가 그럼 나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이번에 승진하면 연봉도 꽤 많이 오르고 미래가 탄탄하게 보장돼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짐짓 놀랐다.


- 비자를 신청했지만 아직 가기로 확실하게 결정한 건 아니야, 혹시 가고 싶어 졌는데 기회가 없을까 봐 우선 비자부터 신청한 거야.

- 그래 그럼. 근데 네가 가기로 결정하면, 나도 함께 가고 싶어 질 테니까 우선 나도 비자부터 신청해 놓지 뭐.

- 무리해서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네가 해야 될 일들이 있잖아.

-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너야. 네가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면, 나도 함께 가고 싶어.


그는 그날 정말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고, 우리는 이내 함께 신체검사를 받으러 다녀왔다. 그리고 만약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면 어떨지에 대해 서로 매일같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가는 것이 현명할지, 옳은 선택인지, 갔다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들부터, 간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뉴질랜드에서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이상적인 이야기들까지 우리는 오랜만에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어느 날은 한국에 계속 있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다음 날은 그래도 한번 떠나보자고 말했다. 마음이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던 나날들이었다.


연애를 막 시작해 서로 손끝만 닿아도 가슴이 터질 것 같던 때에, 나는 종종 말했었다.

나는 낭만주의자야, 나는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며 살고 싶어.

그러면 그는 나와 함께 세상을 떠돌겠다 말했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부유하던 그즈음의 언젠가 오후에, 그는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세상을 떠돌며 살아보는 건 어떠냐 물었다. 그 말에 연애를 막 시작했던 그때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 잊고 있었던 나의 오랜 꿈 하나가, 반짝- 빛이 난듯도 했다. 잊혀가던 꿈이 한번 빛나기 시작하자, 온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결국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가야겠다 결심한 날, 그에게 말했다.


- 나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가기로 결심했어, 나와 함께 떠날래?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한국에서의 모든 걸 정리하고 서로 손잡고 세상을 떠돌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