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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맘 Aug 13. 2021

1.실종된 내 시간 사라진 내 인생

“넌 일 빼고는 다 잘하네”

넌 일 빼고는 다 잘하네


 병원 행사 중 선임 선생님께 들었던 말이다. 환자안전사고사례와 개선방안에 대한 발표로 대상을 받았던 날이었다. 의도는 칭찬이셨을 것이다. ‘발표 준비하느라 고생했네, 의외로 잘 해내서 대견하네, 이제 일만 센스 있게 잘하고 사고만 안 친다면 좋으련만….’이라는 아쉬움을 담아 보내는 한마디 말이다. 순간, 이제야 조금 인정을 받는다는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니고, 밤을 새워 가며 공부를 하고, 인계 연습을 무한 반복해도 쓴소리만 듣던 나에겐 그 지나가는 한마디조차도 달콤했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씁쓸함이 남았다.      


 무슨 일 하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나는 ‘간호사’였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른 건 다 잘해도 본업인 간호업무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본업에 열중하는 시간은 잠잘 때를 제외하면 반 이상을 차지하는 10시간이나 되는데,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정말 출근하기 싫을 땐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하늘로 솟아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까지 했다.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물건을 찾으며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라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소리 없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비참한 바람이었다. 이렇게 나는 깊은 마음속부터 내 존재를 흔적 없이 없애고 있었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강점인 내가 웃음을 숨기며 다녔고, 나를 드러내며 목소리를 내는데 유리했던 내가 결과적으론 의사의 오더에 맞춰 매뉴얼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런 나는 엉뚱한 곳에 있는 물건처럼 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루에도 퇴사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런 나를 꼼짝없이 묶어두는 말이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 해도 결국 첫 번째 직장이 제일 낫다.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항상 강조하던 말씀이었다. 어느 병원이든 아쉬운 점들이 꼭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내가 그 전쟁터를 벗어난다고 해도 또 다른 전쟁터를 만날 것이 뻔하리란 사실은 분명했다. 그렇게 빤히 보이는 시나리오들이 나를 다시 그 병원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혹자는 이런 회사생활 또한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인내하는 시간이라 할지 모르겠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버티었다. 병원 앞 24시간 맥도널드에서 의학용어와 질병 공부로 아침이 되도록 공부하는 내가 대견하다며 자신을 스스로 토닥였다. 하지만 ‘일 빼고 다 잘하는 나’는 그곳에 있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 모습이 아닌 상태로 하루의 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그 시간이 아까웠다.


 내 예전 일상을 돌아봤다. 입사 전에는 내가 이렇게 쳇바퀴 같은 삶을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생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이 주어지니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살 줄 알았다. 신용 카드를 척척 내며 당당하게 고개를 뻗고 다닐 수 있는 직장생활을 기대했다. 방학이나 웨이팅 기간에는 용돈을 모아 신나게 사는 예행연습도 했다.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했다면 다른 것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또 다른 일을 계획한다. 걸음마를 떼면서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아이처럼, 넘어져도 일어나서 어떻게든 온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몰랐던 사실을 깨우치기도 하고 개선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내가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건 오히려 취직 전이었다. 이런 자유가 큰 행복인 줄 모른 채 당연스럽게 지내왔던 것이다. 


 병원 취직 후 신규 때는 공부만 했다. 처음엔 안 혼나려고 공부했다. 나중엔 더 잘해보려고, 일을 빨리 끝내려고, 의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했다. 단지 병원 일에만 적응하려던 것이다. 신규 딱지를 떼어보니 어떤가? 적응되었으니 이제 더는 노력해야 할 의미가 없었다. 겨우 혼나지 않는 위치에 서니 기가 다 빠져 더는 성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는 운동이나 친구들과 술 마시며 병원 욕만 했다. 그렇게 시간을 의미 없이 흘리고 있으니 나도 그저 흘러만 가고 있었다. 기대될 것이 없었다. 알람이 울리면 인상을 쓰며 겨우 일어났다. 내가 기대한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애환도 아닐 것이다. 직장 생활하는 모든 취직자와 창업자들. 아니, 시험공부, 과제, 취직 준비를 위한 스펙을 쌓는 학생들, 심지어 학교를 마치면 여러 가지 학원을 돌아다니며 달이 뜰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요즘 시대의 초등학생들, 독박 육아에 지쳐 마음 놓고 화장실 가는 게 소원이 되어버린 엄마들…. 모두가 같은 고달픔을 달고 산다. 그 시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가족의 눈치를 보거나, 미래의 교과서적인 인생 단계를 꾸역꾸역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슬프다. 내가 정하지 않은 이유로 타인이 정해놓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 시간이 실종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내 인생 또한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은 흔적 없는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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