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부모님은 나의 롤모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노력을 열심히 하는 착한 아이였다.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타고난 나의 성향일 수도 있다. 안정적인 모습의 부모님은 나의 롤모델이었고, 그들이 말씀해 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별 탈 없는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때론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혹은 원하는 결과물을 위해 견뎌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도 순진하게 주어진 대로 착하게 살았다. 그 덕에 배운 것은 '인내하면 언젠가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확신할 수 없는 미래라도 일단 해 볼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그게 나에겐 가장 완벽한 인생이고, 옳은 인생이었다.
인내의 결과는 달다는 것을 강하게 처음 느낀 건 대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였다. 무거운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웃으며 음료를 제공하는 노동은 생각보다 괴로웠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벌어들인 첫 급여가 약 100만 원 정도였는데, 그 달달하기는 대학교 생활하며 한 달 용돈 30만 원을 받을 때와 비교하면 약 3배 이상이었다. 그때 한 번 더 확신했다.
역시~ 고생을 하면 낙이 오는구나.
그렇게 '인내'라는 단어는 나에게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대학병원 원서에 있는 ‘장점’ 란에도 흔하디 흔한 ‘인내력’을 적었고 어떤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스펀지 같은 ‘적응력’도 있다며 단어에 힘을 실었다. 그래야 아무리 힘들어도 오래 버티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본 인사과는 인내력과 적응력이란 단어를 믿은 건지, 다른 모습들도 보였는지 어쨌든 나를 합격시켰다. 이제 나는 스스로 어필한 장점을 야심 차게 보여주어야 했다. 괜히 마음이 약해질까 봐, 중간에 약한 소리 하고 그만두는 다른 동기들에겐 크게 마음을 주지도 않았다. 응원하진 못할망정 동정하거나 때론 애초에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참은 뒤에 달콤함을 맛본 경험이 없나 보다. 그러니 인내력의 위대함을 모르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온갖 수난을 겪은 뒤 확인한 첫 월급통장에서 또 확신했다.
역시~! 진짜 죽을 만큼 힘드니 그만큼 더 많이 받는구나.
이처럼 인내력이 강하다는 것은 장점이자 강점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동적인 삶을 뜻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잘 수용해 나간다는 ‘착함’이란 옷을 입혀 속인 것이다.
계속되는 삼 교대의 고단함, 아픈 사람들을 매일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체력과 건강한 사고까지 잃기 시작하니 회의감이 느껴졌다. 학교 다니던 시절처럼, 잠깐 일시정지하는 방학도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절망감마저 들었다. 그러자 노력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나의 쳇바퀴 같은 삶이 보였다.
지루한 시간을 겨우 버티며 가던 서울행 지하철이, 전혀 다른 방향인 수원행임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행복을 얻고자 하면서 환경에 굴복해 시간과 자유를 잃고 있다면? 그것을 누릴 시간은? 시간이 있다 한들 행복을 누릴 '내'가 사라졌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되냔 말이다. 고생 끝에 마음의 병만 오더라.
내가 지금 괴로운 건 노력을 안 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다. 1년, 2년, 10년을 들여 노력해봐야 그 노력은 나를 또다시 배신할 뿐이다. 단순히 열심히‘만’ 해서 그렇다. 착하게 열심히만 일하는 나는 결국 노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여우가 되도록 노력하려 한다.
패자가 목표에 열중할 때, 승자는 시스템을 만든다.
‘스콧 애덤스’의 저서《열정은 쓰레기다》의 이 문구처럼, 센스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여우 같은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열심히 노력해도 성과물이 다른 모습들을 본다. 같은 역량의 기계들을 가지고도 창출해 내는 이익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열심히 노력하는 시간의 차이라기보단 방향의 차이, 시스템의 차이이지 않겠는가?
처음에 몇 번 던진 농담이 별 반응 없이 헛헛하게 흩어진다면 잠시 멈추고 노선을 변환해야 한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대한 반응이 나올 때까지 열정적으로 던지기만 한다면, 밤마다 이불 킥 할 흑역사가 생겨날 것이다. 차라리 웃어넘길 흑역사라면 다행이지, 우리의 인생 노선이라 생각한다면 웃어넘길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됐었는데 순진하게 땀 흘린 그동안의 시간이 아까워서 답답한 가슴만 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요즘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문구를 기억하며 열심히 달리다 잠깐 멈춰보곤 한다. 땀을 뻘뻘 흘리는 노력으로 열심히 달리는 방향이 맞는지, 혹은 달리지 않고 버스를 타도 되진 않았을 여정이었는지, 혹은 차라리 과감히 투자하여 자동차를 사는 것이 결국엔 신의 한 수가 되었을지 말이다.
노력 그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방향성이나 구체성 없이 무조건 ‘코피가 날 만큼의 노력’, ‘쓰러질 만큼의 노력’만 강조하는 사회적 모습이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