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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Sep 29. 2021

불면증 어른이를 위한 아기 그림책

잘 자요 달님


아가가 눈을 비비면 이 책을 꺼내 든다. 아가보다도 내가 좋아서 매일 읽는다. 사나운 꿈자리를 잠재워주기 때문... 1947년에 나온 책이라는데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아동용 서적이 흔치 않던 시절의, 어쩌면 서툴고 실험적이었을 그림과 표현들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묘한 설렘을 준다. 60년 전 그림책에 푹 빠진 밀레니얼 세대 엄마라니. 뭔가 낭만적이다. 피터팬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일상에 없는 짜릿함을 준다.



배경은 오직 하나 초록방이다. 방의 풍경은 초현실적이다. 이 방의 주인은 토끼 가족인 듯한데 아무리 애들 책이라 하지만 동심의 눈으로 봐도 수상쩍은 광경이 펼쳐진다. 토끼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고양이 두 마리, 침대 옆엔 호랑이 가죽 카펫이 깔려있고, 벽에 걸린 액자엔 하늘을 나는 염소... 일부러 그랬는지 그림이 대략 다섯 가지 색깔로만 구성돼 있는데 심지어 강한 원색이다. 이것도 생경함에 한몫한다. 세상에 어떤 집이 바닥은 주황색 벽지는 초록색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모든 짜임새가 묘하게 아늑하고 나른한 느낌을 준다. 이토록 온통 이질적이다 보니 방 안의 사물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나도 초록방 안의 누군가가 된 느낌이 든다. 즐거운 몰입이다. 저자는 내 마음을 읽은 듯 초록방의 풍경을 간결하게 묘사해준 뒤 자장가를 시작한다.


"잘 자요, 초록방 / 잘 자요, 달님 / 잘 자요, 달을 뛰어넘는 암소..."


온갖 것들에 잘 자라고 속삭여 주는데 심지어 옥수수죽과 빗에도 인사를 건네고 급기야 "잘 자요, 아무나"라고 말한다. 엉뚱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잘 자요 향연은 별님, 먼지, 소리를 끝으로 멈춘다. "잘 자요, 소리들" 대목에선 어둠이 깔린 초록방의 전경이 드러난다. 벽난로, 벙어리장갑, 장난감 집, 아기고양이...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고 장갑의 솜털까지 느껴질 듯 친근하다. 작가는 애써 의인화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옥수수죽에도 생명을 부여할 지경으로 초록방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다. '먼지' '소리'와 같은 개념을 '잘 자요'에 접목하다니 작가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이것들이 등장한 순간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는 완벽하게 초록방의 일원이 됐다.


원서로 보면 라임이 끝내준단다. 하지만 번역 과정에서 빚어진 어쩔 수 없는 어색함도 그 자체로 괜찮았다. 불면증 어른이들에게 추천한다. 잠이 솔솔 오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효과는 있다.


[잘 자요, 달님]

그림 클레먼트 허드

글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옮김 이연선

출판사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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