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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 Feb 02. 2022

남성의 성장과 여성의 성장, 그리고 달리기

리코리스 피자 Licorice Pizza, 폴 토마스 앤더슨, 2020 

'성장'은 일반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며, 또한 개별 인간들에게 영속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리코리스 피자가 우리에게 의문하도록 하는 개념은 바로 "성장"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1970년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출신이며 21세기 초반 미국 인디영화를 주도할 감독들을 성장시킨 뉴욕대학교 출신으로, <매그놀리아(Magnolia)>,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감독이다. 그는 또한 피오나 애플 (Fiona Apple), 라디오헤드(Radiohead)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음악인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하며 동시대의 다양한 아트씬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2020년대에 새로 선보인 1970년대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리코리스 피자(Licorice Pizza)>는 20세기 미국 문화의 핵심 코드인 베트남, 한국전쟁, 히피 문화 유행 이후의 젊은이들의 성장 이야기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에서 다루고 있다. 



영화는 게리와 알라나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게리는 15살로, 연말 학생 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찍기 위해 온 남성 고등학생이며 알라나는 학생 앨범을 찍는 업체에서 일하는 25살의 여성이다. 게리는 첫눈에 알라나에게 반하며, 그녀를 처음 만나고 집에 돌아와 8살짜리 동생에게 그녀가 "내가 결혼하게 될 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삶을 (게리보다는 조금?)더 아는 알라나는 게리의 추파가 어이 없지만, 그 원천 모를 순진한 '믿음'이 또한 귀엽다고 생각하여 그와의 만남 자리에 나간다. 여기서 이들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알라나가 게리와의 만남 자리에 나온 것이 또한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의 성장은 특정한 한 남성과의 맺는 성애 관계라는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남성 사회에 자리 잡으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알라나는 절망적이다. 이스라엘계 이민자이자 유대인인 아버지는 딸들에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하다. 그의 언니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꾸리는 부동산업에서 일을 돕고 있으며, 알라나는 그곳, 자신의 가족과 가정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한다. 절망은 간절하게 바라지만 그것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의 부재와 동의어인 셈이다. 알라나가 가족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그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를 만나는 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를 열렬히 동경하는 게리는 알라나에 비해 열 살이나 어리고, 게리가 자신이 잘 나가는 아역배우이며, 꽤나 잘 사는 부모님을 두고 있다고 어필을 한다 해도 15살 소년은 아직 '아무'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알라나와 게리는 연인 관계가 아닌 채로 앞으로 3-4년 정도 서로의 삶을 공유하게 된다. 이 시간은 사회적으로 게리가 청소년에서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간이며, 이미 25살이던 알라나에게는 매력적인 젊은 여성에서 나이든 여자로 전환되는 시기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 게리와 알라나가 이루는 성장은 서로 그 성격과 목표와 기대치가 모두 다른데, 게리에게는 '한 남성'으로 사회에 진입하는 것이라면 알라나에게는 좋은 (여성)상품에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재고품'이 되는 성장인 것이다. 



어쩌다 보니 '소년' 게리의 남성으로서의 성장을 옆에서 보조하게 되는 알라나는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물침대를 팔겠다고 나선 게리를 위해 수영복을 입고 판촉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게리 또한 알라나의 사회 진입(?)을 보조하고자 노력한다. 아역 배우로서의 경험을 살려 알라나가 배우 오디션을 보러갈 때 동행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게리가 갑자기 살인범으로 몰려 경찰관들에게 끌려갔을 때 알라나는 전속력으로 경찰차를 쫓아가 게리 곁에 있어주거나, 알라나가 유명한 중년남성 배우의 하루 저녁 놀잇감이 되고 버려졌을 때 게리가 (다시 한 번)전속력으로 달려 그녀 곁에 있어주면서,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시간들을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남자들의 성장은, 여성인 알라나에게 놓여진 성장의 과제("한 남성을 만나 그로부터 사랑 받는 성실한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만큼 단순하지(?) 않다. 남성들은 비즈니스맨이 될 수도 있고, 액션배우, 드라마 배우, 로맨스 배우가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의 폭력성과 충동을 예술성으로 무장한 예술가, 또한 우리 사회에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도 될 수 있다. 게리와 게리의 (그녀보다 열 살 어린) 친구들의 물침대 사업을 보조하다 지쳐버린 알라나는 오랜 친구를 통해 '시민이 주인인 삶'을 제시하는 정치인의 캠페인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 



알라나는 금세 그가 제시하는 비전과 그의 언뜻 보기에 순결한 인간성에 반하게 되며, 게리에게 "어째서 너는 이딴 물침대나 팔고 있느냐"며 그를 비난한다. 알라나의 말은 물침대를 파는 비즈니스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정치의 '고상함'에 비견할 바 못하다는 단순한 사회적인 편견을 담고 있지만, 게리를 향한 알라나의 '비난'은 꼭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를 이토록이나 소중히 여기며, 그녀가 또한 소중히 여기는 한 남성(그러니까 알라나의 삶을 구제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 한 남성)이 더 고귀한 행위를 하는 남성이었으면 하는 바람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의 직업이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이들이 연인관계를 맺는다면 향후에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알라나는 그녀가 직접 비즈니스맨이 되거나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기름이 다 떨어진 대형 트럭을 굽이진 언덕을 후진하여 내려올 수 있는 멋진 운전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포르투갈어와 승마, 펜싱을 할 수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여성인 알라나는 비즈니스맨이나 정치인을 보조하는 인물로 성장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서로를 끔찍히 아끼는 알라나와 게리는 이 성장의 시기를 통해 사랑을 이루게 될까? 감독이 선택한 엔딩에 대해서 관객의 호불호는 갈리게 될 것 같다. 언뜻 영화적 문법을 완성하기 위해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엔딩은 사실 그렇게 로맨틱하지도, 그렇게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매순간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인 반면, 사회는 개개인을 지금 여기 -가장 영원해 보이는 그 시간- 이곳의 문법에 옭아매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따로, 혹은 함께 숨차게 달리는 알라나와 게리가 도달할 곳은 어디일까? 사랑이 그들을 한 번, 서로를 각자의 목적지로서 서로에게 달려가도록 하였다면 이들의 달리기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때도 그들은 함께 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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