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이임 Apr 04. 2022

이야기

Humans of Seoul

23살 때가 생각난다. 여행자금이랑 학비 벌겠다고 공장을 다녔다. 잠깐이지만 야간도 했다. 20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했다. 새벽 두 시쯤에 밥을 먹었다. 야식이라는 이름값 못하게 드럽게 맛없었다. 성격 드러운 조장 때문에 입 밖으로 욕 튀어나올까 입단속하느라, 팔은 바쁜데 입은 무거웠다. 어깨는 뭉쳐서 감각도 없었다. 밤낮을 강제로 바꾸는 건 사람을 살살 말려 죽이는 것과 비슷했는데,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거기서 만난 이모 이야기가 재밌어서다.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잠깐 일하고 번 돈으로 인도에 간다고 했다. 이미 여러 번 다녀왔더라. 남쪽도, 동쪽도 갔다 와서 이번엔 서쪽으로 간다고 했나. 어쩐지 범상치 않은 아우라는 K에선 만들어질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한 번 가면 몇 달 동안 머문다고 했다. 소랑 같이 바다에 들어간다고도 했다. 몇 주간 네팔에서 트레킹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심장이 쿵쿵댔다. ‘내가 원했던 게 이거잖아. 나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이것은 휴학하고 얻은 최고의 깨달음이다. 책상에 앉아 몰래 핸드폰 하며 듣는 박사님들의 수업보다 일상에서 만난 어떤 이의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배움이 있다는 것. 딱 그 시점에 Humans of Seoul에 합류했다. 공식적으로 타인의 이야기를─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싶은─깊은 곳에 있던 기나긴 시간을 듣는다. 어떤 문장은 무기력한 나를 일으키기도, 어떤 한 마디는 질문 투성이인 삶의 명쾌한 대답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결혼을 앞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나는 운명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마음을 쿵쿵 때리는 많은 이야기. 그것들엔 유통기한이 없어 마음 한 켠에 스며 오래도록 남아있다.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늠될 것만 같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HoS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능하다면 국적도 아무런 상관이 되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수십 명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거대한 전기와 같은 노인의 인생이, 동화책 같은 어린아이의 시간이 나에게 현재가 되는 일이다. 그렇게 타인의 시간을 내 삶에 편입해 토닥이며 쌓아갔다. 그러면 좀 더 커진 내가 된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갑자기 벅차오른 이유는… 정기회의를 끝내고 예전 인터뷰를 하나하나 읽게 되어서다. 나의 친구들도 시간이 난다면 HoS 첫 게시물부터 읽었으면 좋겠다. 인스타그램도 있지만 페이스북에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 시기에 더 뭉클했던 건 코로나 이전의 서울이 너무나 싱그럽게 담겨있기 때문도 있다.


하나하나 보다 보면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이 비죽 올라온다. 그게 어떤 이름을 가진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더 따듯한 세상을 상상케 하는 건 확실할 터. 세상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이야기를 진득하게 듣고 기록하는 마음과 다름없을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