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읽고 쓰고 둔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아 몹시 실망스럽다.
『하얀 성』 /오르한 파묵/이난아 옮김/ 민음사 / 2022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다가 터키로 잡혀 온 이탈리아인이 있다.
터키의 궁정에서 열심히 일하는 호자라는 인물도 있다. 호자는 서구의 천문학과 의학, 신기술과 신무기를 배울 기회라 생각하고 포로이자 노예인 이탈리아인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렇게 교류하며 서로의 지식과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을 순조롭게 지나칠 수 없는 놀라운 장치가 있다. 바로 두 사람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의 묘사를 통해 “왕자와 거지” 또는 “광해:왕이 된 남자”가 떠올랐다. 언젠가 분명히 두 사람이 신분을 바꿔 사고를 칠 것이라는 예감. 조금 더 나가서 출생의 비밀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한국 드라마의 클리세이고 노벨상 작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듯. 하여간 그 이후 15년간의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의 애증의 줄타기이다.
보잘것없는 출신의 호자가 천문학과 과학 지식을 이용하여 출세한다.
서양의 과학 지식을 배우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밀당한다. 특히 흑사병에 대해 진단하고 예방책을 만드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호자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 이탈리아인은 왕실의 점성술사가 되어 행진하는 호자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다. 서로가 모르는 과거의 개인사도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을 넘어 꺼내놓기 힘든 부끄러운 부분까지 공유한다. 그것은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서로를 얽어매는 약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일 같은 꿈을 꾼다. 베네치아의 가면무도회. 가면 뒤에 나오는 호자의 얼굴을 착각하고 환영하는 어머니와 약혼녀.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 또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운명론.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죄의식까지.
결국은 그렇게 됐다.
멍청한 무기와 원정의 실패 책임을 피하려고 이탈리아인이 야반도주한 이후, 호자는 왕실 점성술사로 컴백하고 무난하게 정치하며 말년에 회고록을 쓴다. 그날 새벽, 도망간 사람은 이탈리아인으로 위장한 호자였고, 호자의 침상으로 들어간 것은 자신이었다고 기술한다. 그렇게 기막힌 이야기를 정리하면서도 끝내 이탈리아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즉 작가 자신의 이름이 없다. 현재 적혀있는 작가 이름 ‘이불장사의 의붓아들’은 호자의 신분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신분을 바꿨다는 것을 누설하는 책의 저자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도 이탈리아에 잘 살아 있는 예전의 호자를 보호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완벽하게 호자가 된 현재의 자신에 대한 확신인가. 가끔 파디샤가 의심의 질문을 하면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고 업적이라고 교묘하게 말을 돌린다.
20세기에 발견된 17세기 노인의 회고록.
그렇게 떠난 호자가 이탈리아에서 잘 살고 있다는 후일담으로 끝냈으면 좋았을 이야기가 느닷없이 방문한 노인 때문에 십육 년 만에 다시 들춰보며 독자의 상상을 흔든다. 내용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다. 우연히 발견된 육필 원고라는 이중의 방어막을 치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질문한다. “나‘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환경에 의해 결정되나. 내가 나임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에게 계속 증명해야 하나. 나의 존재는 나만 알면 되는가. 과거에 이탈리아인이었던 나는 현재는 호자이고 그렇게 내 안에 두 사람의 경험과 지혜가 함께한다.
터키라는 나라가 그랬다.
학교에서 배우는 유럽 중심의 역사에는 오스만 제국으로 등장하여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유럽의 동쪽 끝을 차지하며 서구화되고 개방된 모습으로 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전통적인 무슬림 국가들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으론 정치적 후진성과 소수 민족 문제 등으로 서구로부터 배척받기도 한다. 이런 정치 문화적 배경 때문에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을 말할 때면 항상 ‘동서양의 대비를 통해 터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이라는 수식이 붙어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그 정체성의 이미 서구의 시선으로 터키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앞선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 주고 흑사병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미 터키는 17세기부터 서양이었다. 이탈리아인과 터키인이 쌍둥이 같은 외모를 가졌다는 것은 융합된 문화의 결과. 그래서 굳이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이름이 주어질 때 하나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모든 경험을 함께 가진 두 사람에게는 하나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나 그나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정체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