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5>, 다시 그녀를 만나다
지난 시간 <Table5>는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를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와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진 B사감은 “곰팡 슬은 굴비”같은 외모를 가진 노처녀에, 러브레터를 받은 여학생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성으로 묘사되죠. 그러던 중 기숙사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학생 세 명이 그 정체를 확인하러 사감실 쪽으로 향합니다.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의 애를 말려 죽이실 테요? 나의 가슴을 뜯어 죽이실 테요? 내 생명을 맡으신 당신의 입술로…….
셋째 처녀는 대담스럽게 그 방문을 빠끔히 열었다. 그 틈으로 여섯 눈이 방안을 향해 쏘았다. 이 어쩐 기괴한 광경이냐! 전등불은 아즉 끄지 않았는데 침대 위에는 기숙생에게 온 소위 ‘러브 레터’의 봉투가 너저분하게 흩어졌고 그 알맹이도 여기저기 두서없이 펼쳐진 가운데 B 여사 혼자- 아모도 없이 제 혼자 일어나 앉았다. 누구를 끌어당길 듯이 두 팔을 벌이고 안경 벗은 근시안으로 잔뜩 한 곳을 노리며 그 굴비쪽 같은 얼굴에 말할 수 없이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는 ‘키스’를 기다리는 것같이 입을 쫑굿이 내어민 채 사내의 목청을 내어가면서 아깟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다가 그 넋두리가 끝날 겨를도 없이 급작스레 앵돌아지는 시늉을 내며 누구를 뿌리치는 듯이 연해 손짓을 하며 이번에는 톡톡 쏘는 계집의 음성을 지어,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다가 제물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더니 문득 편지 한 장(물론 기숙생에게 온 ‘러브 레터’의 하나)을 집어들어 얼굴에 문지르며, “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 하고 몸을 추스르는데 그 음성은 분명 울음의 가락을 띠었다. “에그머니, 저게 웬일이야?” 첫째 처녀가 소곤거렸다. “아마 미쳤나 보아, 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왜 저러고 있을꼬.”
둘째 처녀가 맞방망이를 친다.
“에그 불쌍해!” 하고, 셋째 처녀는 손으로 고인 때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 『현진건 문학 전집 Ⅰ』, 국학자료원, 2004.
여학생들이 연애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매사에 깐깐하게 굴던 B사감이 사실은 연애를 동경했다는 깜짝 반전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 그녀는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를 혼자서 연기하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죠. B사감은 마치 다중인격처럼 남자의 목소리를 내는가 하면, 또 혼자서 입술을 쭉 내밀며 키스하는 시늉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기겁하며 그녀가 미친 것 같다고 조롱합니다. 또 어떤 여학생은 눈물을 닦으며 B사감을 동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B사감은 정말 불쌍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일 뿐이었을까요? <Table5>는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박제된 B사감을 현진건의 소설에서 꺼내어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B사감은 사실 다음 날 있을 연극 연구회에서 선보일 연기를 연습하고 있던 게 아닐까?’
<Table5>가 재해석한 <The B사감: New World>는 이러한 상상에서 시작합니다. 사실 B사감은 밤마다 연기 연습을 하며 남몰래 배우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여학생들이 실제 남자 목소리로 착각할 만큼 B사감은 연기에 재능이 있는 여성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연애보다는 배우의 꿈이 더 중요했을지 모를 B사감을 위해 <Table5>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 문화를 조사해보기로 했습니다.
신파극 <장한몽>, 조선을 눈물바람으로 만들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연극이라면 신파극 <장한몽>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감동적인 스토리로 관객들을 눈물짓게 하는 영화를 두고 신파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종종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신파(新派), 즉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사실 일본에서 건너온 말입니다. 전통적인 연희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연예술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개화기 조선에서도 대단히 유행하게 됩니다.
신파극은 대부분 주인공이 큰 곤경에 빠지면서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마지막에 행복을 찾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소설과 신소설이 유행하던 식민지 조선에 신파의 바람을 몰고 온 작품이 바로 <장한몽>입니다. 이 작품은 1965년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영화로 각색되어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들도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냐!”라는 대사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조선의 슈퍼 베스트셀러였던 「장한몽」과 그 원작으로 알려진 일본 소설 「금색야차」
주인공 심순애와 이수일은 어릴 적부터 정혼자로 약속하고 한 집에서 자라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대부호의 아들 김중배가 순애에게 접근하면서 이들의 사이는 점차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김중배의 화려한 외모와 물질 공세에 마음을 빼앗긴 순애는 가난한 학생이자 천애고아인 이수일 대신 김중배와 결혼하기에 이릅니다.
수일은 순애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복수를 꿈꿉니다. 이후 수년간 고리대금업자 밑에서 돈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수일은 우연히 순애와 마주치게 됩니다. 순애는 남편의 방탕으로 인해 호화로운 생활의 그늘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애의 배신에 큰 심적 타격을 입었던 수일은 그녀를 시종일관 무시하고 거부하지만, 순애는 돈에 눈이 멀어 진정한 사랑을 놓아버린 과거를 반성하고 수일의 애정을 갈구합니다. 수일에 대한 상사병이 심해져 광증까지 일으키던 순애는 끝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대동강에 투신자살하려 하지만 가까스로 구출됩니다.
순애에게 냉담하던 수일이 결국 그녀를 용서하고 둘은 단란한 새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순애와 수일이 보여준 돈과 사랑 사이의 갈등은 관객들에게도 큰 공감을 얻으며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신파극을 넘어 근대극으로!
한편, 3·1 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휩쓸고 간 자리에 신파극이 아닌 조선의 독립을 위한 근대극을 펼쳐 보이겠다는 포부를 가진 청년 지식인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일본 작품을 번안·번역한 신파극에서 벗어나 조선의 현실을 잘 반영한 희곡을 직접 창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장한몽>을 비롯해 당시 조선에서 인기를 끌던 신파극 대부분이 일본의 작품을 번안하거나 번역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게다가 <장한몽>의 원작으로 알려진 일본 소설 「금색야차」 또한 영국 작가 버사 클레이의 「여자보다 약한 것(Weaker than a Woman)」을 번안한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집니다) 직접 조선인의 생활을 그리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겠 노라고 결심한 청년 지식인들은 속속들이 연구회를 결성하고 연극운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조선에 최초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을 소개한 현철. 그 당시에는「하믈레트」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은 조선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현철(1891~1965)입니다. 현철은 처음에는 의학 공부에 뜻을 두었지만 한 책에서 “민족적 의력(醫力)이 발달되지 못한 나라는 연극이 발달되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을 읽은 후 연극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메이지대학에서 게이주쓰좌(藝術座) 부속 연극학교로 적을 옮기어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에게 사사합니다.
입센, 체호프, 톨스토이의 연극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극 경험을 쌓은 후 새로운 연극 운동을 배우기 위해 중국 상해에도 체류합니다. 1919년 조선으로 귀국한 현철은 서울 서대문 근처에 예술학원을 설립해서 연극인을 양성하는 한편,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잡지 중 하나인 『개벽』의 창간 멤버로 활동합니다. 그가 『개벽』에 발표한 「소설개요」는 조선에서 소설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논의한 최초의 글로 평가됩니다. 또한 그의 주전공이라 할 수 있는 희곡 이론과 연극론에는 더욱 뛰어났는데요, 「희곡의 개요」는 희곡의 구조를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프라이타크(Frytag. G.)에 이르는 서양 희곡 이론을 소개합니다.
현철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개벽』에 「하므레트」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소개했습니다. 조선 지식인들은 서구 문학에 대단한 열망을 보였는데요, 이미 그 시기부터 입센과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이 다수 번역 소개되었습니다. 이후 KAPF의 대표 비평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박영희는 1920년대 초반까지 유미주의 예술에 흠뻑 취해 있었는데요, 이 시기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사로메」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잡지 『백조』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작품들이 청년 지식인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은 조선에 ‘노라이즘’을 일으켰고, 여성해방 의식을 부르짖은 신여성들은 종종 노라에 빗대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 노라가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고 집을 떠나는 것을 줄거리로 하는데요, 입센은 이를 통해 여성의 해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자각과 그를 기반으로 한 사회 전반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극작가 입센이 널리 소개되면서 소위 ‘근대극’이라는 연극 용어도 뚜렷이 부각되었고, 그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지식인들이 연극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인형의 집 Ⓒrfdesigns.org
조선인이 쓴 조선의 연극이 상연되다.
근대극 운동과 함께 창작희곡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가장 긴박한 문제였던 자유연애와 조혼 문제를 다룬 희곡을 특히 많이 창작했습니다. 이 시기까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정한 상대와 결혼하는 조혼의 전통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이 근대적 개인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상대와 연애,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유연애가 매우 유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요, 남성 지식인들 대부분이 이미 구 여성인 아내를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이들의 자유연애는 순탄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조혼한 청년이 신식 여성과 사랑함으로써 빚어지는 부모 세대와의 도덕적 갈등을 묘사하는 작품을 주로 창작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소설 「무정」의 작가 이광수도 동경 유학생 시절 「규한」이라는 희곡을 창작해 조혼 문제를 다뤘습니다.
근대극 운동에 뛰어든 청년 지식인들은 대부분 동경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유학생 중심으로 연극 연구단체와 극회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동우회(同友會)입니다. 동우회는 1920년 봄 동경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직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탄생한 본격적인 근대극 연구단체라고 합니다. 주요 멤버는 이후에도 극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린 김우진, 조명희, 고한승, 최승일 등 2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외국의 고전 및 근대극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셰익스피어, 괴테, 하우프트만, 고골리, 체홉, 고골리 등 쟁쟁한 극작가들의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듬해 여름부터는 토론과 연극 이론 연구에 머물지 않고 하기 순회 연극단을 조직해서 직접 연극 공연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순회 연극단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 번째는 작품 비평과 이론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무대에서 연극 운동을 실천하겠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동경 등 각지에서 어렵게 공부 중인 고학생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대적 신학문을 공부한 지식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만큼 한 명 한 명의 학생들이 귀한 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궁핍한 환경에서 어렵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며칠째 밥을 굶다가 결국 하나 있는 겨울 외투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밥을 사 먹는 바람에 한겨울에도 외투 없이 지내야 할 만큼 힘든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死)」는 이처럼 가난에 허덕이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마는 조선인 유학생 김영일의 삶을 그린 희곡 작품입니다. 김영일의 비참한 삶이 관객들에게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주면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이 작품은 동우회의 단골 레퍼토리로 공연되었습니다.
동우회 순회극단은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부산~경성~개성~함흥에 이르기까지 전국 25개 도시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또 동우회는 연극 공연만이 아니라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와 윤심덕의 독창과 같은 음악 공연이나 학생들의 연설도 무대에 올렸다고 합니다.
동우회 순회극단의 연출, 무대감독, 공연비 일체를 담당한 김우진(1897~1926)은 1920년대 가장 탁월한 극작가로 꼽힙니다. 그의 대표작인 「산돼지」는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 꼽히며, 신파극이 주된 경향을 이루던 1920년대에 보기 드문 전위적인 실험극이었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소프라노 윤심덕과 정사(情死)하면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다른 지식인들의 자유연애가 마찬가지로 김우진은 이미 구 여성 아내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김우진과 윤심덕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고, 두 사람은 번민 끝에 현해탄에서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최초의 소프라노로 유명세를 탔던 윤심덕과 젊은 나이에 문학적 성취를 이룬 김우진의 동반 자살 사건은 당시 대단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온갖 추측과 소문이 돌았는데, 두 사람이 자살을 가장하고 사실은 유럽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질 정도입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을 다룬 SBS 드라마 <사의 찬미> 여배우의 화려한 등장
배우를 꿈꾼 B사감을 위해 1920년대 연극 문화를 조사하기로 한 만큼,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입니다. 조선 최초의 여배우는 누구일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이월화(李月華, 1904~1933)입니다.
이월화는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다니다가 신파극단 신극좌(新劇座)의 여배우로 등단했습니다. 이후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윤백남이 이끄는 민중극단에서 활동하며 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월화라는 예명도 이 시기에 윤백남이 지어주었다고 하네요. 또, 윤백남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조선 최초의 영화 <월하의 맹서>(1923)에도 출연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에서 지원해서 제작하게 된 영화로 저금 장려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극장에서 개봉되는 대신,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각 지방의 공공기관에서 무료로 상영되었습니다.
연극의 여성 배역을 주로 남성 배우가 맡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영화에 여배우가 출연한다는 점이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여형 배우(女形俳優 : 여장을 하고 여성 배역을 맡는 남성 배우) 이응수 씨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하니, 여배우 이월화의 출현이 얼마나 놀라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전에도 김소진, 마호정과 같은 소수의 여배우가 연극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이 영화 출연으로 인해 이월화가 최초의 여배우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장안의 모던걸로 명성 높았던 이월화 (1904~1933)
이월화의 활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박승희, 김기진, 이서구 등의 동경 유학생이 조직한 토월회(土月會)의 제1회 공연에서 여주인공을 맡게 됩니다. 극단의 이름인 토월회는 “현실에 토착해 있되(土) 이상은 명월(月)과 같이 높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토월회는 처음부터 연극 운동을 지향하고 만들어진 모임은 아니었습니다.
초기에는 문학과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모인 단체인 만큼 회원들의 자작 문학작품과 그림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던 중 대중에게 파고들 만한 예술로는 연극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박승희의 주장에 힘입어 연극 운동 단체로 성격이 변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하에 당시 유행하던 통속적인 신파극에서 벗어나 계몽과 예술을 목표로 사실적인 신극(근대극)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1923년 여름, 조선극장에서 첫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유진 필롯의 「기갈(飢渴)」, 안톤 체홉의 「곰」, 버나드 쇼,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와 같은 번역·번안 작품과 함께 박승희의 창작희곡인 「길식」까지 총 네 작품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월화는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어라 거짓말했나」의 주인공 오로라 역을 맡았습니다. 남성 배우가 여성 배역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당시, 토월회는 여성 인물은 반드시 여배우에 의해 체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이로써 토월회의 활동과 함께 본격적인 여배우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월화의 토월회 첫 공연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습니다. 본래 신파극 배우였던 이월화는 정해진 각본 없이 즉흥적으로 대사와 줄거리를 꾸며나가는 ‘구찌다테(口建)’식 연기에 익숙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신극을 표방하는 토월회의 공연에서 처음으로 대본 연기에 도전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 공연 중 주연인 박승희와 이월화가 공연 도중 대사를 잊는 바람에 중간에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 초유의 사태를 두고 누군가는 이월화의 구찌다테식 연기에 박승희가 당황하는 바람에 대사를 잊었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박승희가 대사를 잊어버린 것을 이월화가 즉흥 대사로 모면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진실을 알 수 없지만 결국 이로 인해 토월회의 창립공연은 화려한 무대배경과 무대장치에 비해 배우들의 무대 경험과 연기력이 미숙하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9월, 토월회는 절치부심해서 2회 공연을 올립니다. 이번에는 톨스토이의 「부활」, 마이아 펠스타의 「알트 하이델베르크」, 스트린드베리의 「채귀(債鬼)」, 버나드쇼의 「오로라」(「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에서 제목 변경)를 상연했습니다. 이월화는 「부활」과 「알트 하이델베르크」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데요, 이때 「부활」 공연을 보러 온 나혜석이 이월화의 천재성에 경복 했다며 극찬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스타 반열에 오른 이월화는 박승희와의 연애 문제로 인해 1924년 토월회를 탈퇴하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생활고로 강릉 권번의 기생이 되기도 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댄스홀의 댄서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일본 모지(門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죽음에 관해 객사, 현해탄 투신자살, 음독자살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이월화는 삶의 마지막까지도 구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합니다.
한편 토월회는 제2회 공연에서 흥행에 성공하지만, 공연 준비에 너무 많은 자금을 지출하면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게다가 창립 동인 중 전문 연극에 뜻이 있던 인물은 박승희 한 명이었기 때문에 다른 동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죠. 이때 대다수 단원이 탈퇴하게 되면서 토월회는 본격적인 전문극단으로 변모합니다. 제3회 공연부터는 완전히 상업극을 지향했으며 이후 본격적 흥행 극단이 되어 점차 규모를 키워갑니다. 이후 검열과 재정난 등으로 슬럼프를 겪던 토월회는 윤심덕을 영입하면서 잠시 활기를 띠는 듯하다가 결국 1926년 해산하게 됩니다.
통속성이 과도하게 강조된 신파극만이 상연되던 1920년대, 토월회는 리얼리즘에 가까운 연극을 지향하고, 연출·연기·극본·무대장치 등 다방면에서 연극계의 혁신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됩니다. 그러나 토월회 또한 아직 신파극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사조 또한 리얼리즘보다는 낭만주의에 가까운 과도기적 성격을 보였다는 것도 사실이죠.
창립공연 이후 더 이상 극작가를 발굴하지 않았고, 제2회 공연 이후로는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평가가 마냥 부당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월회는 1920년대 초 신극(근대극) 운동을 주도했지만 정통적 근대극을 할 정도의 역량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Research & Write: 이은솔
은솔은 Collective <Table 5> 멤버입니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소설을 전공합니다. 식민지기를 주로 연구하며, 신여성의 자기서사에 관심 있습니다.
Reference: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서연호, 『우리 연극 100년』, 현암사, 2000.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신론』 상·하, 태학사, 2011.
이상우, 『극장, 정치를 꿈꾸다』, 테오리아, 2018.
이상우, 「1910년대 동경유학생학우회와 근대극 – 이광수와 최승만의 경우를 중심으로」, 한민족어문학회, 『한민족어문학』 no.86,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