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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와우 Jul 09. 2023

빈들에서

누가복음 1:67-80 묵상하기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장으로 세례요한의 탄생 이전의 일화를 보여주는 장면 중 일부입니다. 제가 본문의 내용을 재구성해서 스토리를 전해드릴테니, 눈을 감고 상상하시면서 들어보셔도 좋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면서 들어보셔도 좋으니 각자만의 방법으로 성령의 지혜를 경험하셔 보기를 바랍니다. 


여느때처럼, 제사장이라는 직업을 가진 스가랴는 관례대로 제비뽑기에 당첨되어 성전에 가서 분향을 하는 순서를 맡게 됩니다. 분향을 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 스가랴에게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곧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 예언해줍니다. 출산시기가 가능하지 않은 연로한 스가랴와 엘리사벳에게 말도 안되는 예언이었죠. 더군다나 그들에게 올 아들은 그냥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구원의 다리가 되어줄 중요한 인물임을 예언해주고 있죠. 이 어마어마한 예언을 들은 스가랴와 엘리사벳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표현했죠. “말도 안되는 엄청난 일을 도저히 믿을수가 없군요!”라고 하지만, 천사는 이 좋은 소식을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어 전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믿지 못하니, 믿음이 생기는 사건이 올 때 까지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죠. 


믿음 없는 자에대한 벌칙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가브리엘 천사는 20절에 보면 “때가 이르면”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예언해줍니다. 그리고64절에 보면 관례대로 아비의 이름을 따라 아이 이름을 짓지 않고, 아내의 의견을 따라 그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하는 순간 혀가 풀려 말을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더 디테일하게 볼 본문은 천사가 예언했던 그 충만한 때를 경험한 스가랴가, 이제 막 태어난 아들 요한을 통해 드리는 고백의 기도문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쨋든 기적같이 스가랴는 임신을 하게 되고 5개월이 지났을 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매우 비슷한 경로로 같은 천사에게 임신을 예언받고 ‘구원자’를 잉태하게 됩니다. 둘 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초월적인 임신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장면은, 누가라는 저자는 요한과 예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연결되었음을 어머니들간의 연결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은 임신한 상태로 석달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이 장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본문에 나와있지 않지만, 저는 누가복음 전체를 이끄는 아주 중요한 스토리가 여기로 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신학적 상상을 해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초월적 방법으로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중요한 인물들을 잉태한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낼까요? 처음에는 얼떨떨 했을 것이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자 두려움도 컸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외면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지혜롭게 택했습니다. 바로 비슷한 경험을 한 벗을 찾아갔던 것이죠. 요한의 엄마 엘리사벳은 잉태한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 아이와 엄마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이 세계를 구원해 줄 수 있을지에 관해 예언해줍니다. 바로 마리아를 보는 순간 태아의 활발한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요. 임신한 어머니들만 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진정한 축복의 표현일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마리아는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드리는 장면이 뒤이어 나옵니다. 유명한 마리아 찬가지요. 시간이 되시면 꼭 본문을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지만, 힘들고 지칠때 이 찬가를 묵상하면 모두가 안될거라고 여겼던 비참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주님의 긍휼하심이 그 모든 역경으로 인한 두려움들을 뛰어넘게 만드시는 지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분명, 엘리사벳을 통해 큰 위로를 얻었고 현실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녀들이 함께 보낸 3개월의 시간은 분명 서로에게 주님의 은혜를 공유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때로는 현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찾아가 함께 지혜를 나누는 일이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음을 신앙의 우정을 통해 발견하게됩니다. 


마리아가 떠나고, 엘리사벳은 출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출산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축하해주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당대의 유대인의 관습대로 아비 이름을 따라 아이 이름을 지을 것을 제안하지만, 엘리사벳은 주님이 주신 예언대로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시키는 데 중요한 인물이 될 그 아이의 사명에 걸맞는 고유의 이름을 지을 것을 제안합니다. 남편인 스가랴 역시 그 아내의 의견을 따라 요한이라는 이름을 말 못하는 상황에서 석판에 쓰자마자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죠. 그리고 이어서 스가랴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찬가처럼 그의 고백 역시 주님의 긍휼하심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로부터 어떻게 일으켜세워주시고자 하는 지를 아이를 향해 고백하는 장면이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향해 여느 아버지의 고백과는 다르게, 주님의 예언을 마음깊이 신뢰하며 향후 죄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선지자에게 돌리는 주님을 향한 영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본문 77절부터 79절의 스가랴의 고백을 제가 다시 풀어서 소개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당신의 구원을 알게 하시리니, 이는 온전히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알게하소서.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들에게 햇살이 우리 몸에 스며드는 것처럼 구원을 경험하게 해주시고, 지쳐서 무거운 우리네 발걸음을 평화로움으로 입게하사 당신의 구원하심을 몸소 체험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세요.”


이렇듯 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요한은 어떤 인물일까요? 예수와 요한의 생애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후 예수의 공생애 시작 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한 요한이기에 그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저서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꼭 누가복음을 읽어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본문의 마지막 80절에서 누가는 요한의 앞으로의 삶을 다음과 같이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리라.” 빈들은 어떤 곳일까요? 빈들이라 하면 상상하기론 공허하고 외롭고 춥고 넓고 광활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가 준비되는 날 동안 빈들에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요? 아무리 좋은 일을 하는 때 까지의 준비기간이더라도 자녀를 빈들에 홀로 보내는 아비의 심정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빈들이 그냥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이라고 보여집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다른 저자들보다 코스모폴리탄적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확대되는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저자이기 때문에, 시공간 개념을 초월한 ‘빈들’ 이미지가 더 적절한 해석일 것 같습니다. 빈들에서의 시공간은 어쩌면 ‘은혜를 몸소 경험하는 사건’으로 해석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깊이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은혜의 때를 경험한 스가랴 자신도, 빈들이라는 사건은 언뜻 보기에는 아프고 힘들어 보일지라도 그 너머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임을 경험했기에 나올 수 있는 고백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인으로써 은혜의 사건은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이자 구원의 증표가 됩니다. 그것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초월적인 사건이기에 우리는 몸소 그 사건을 준비하며 깨달아 볼 수 있는 빈들에 머물고 있어야 합니다. 온전히 보여지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내 삶을 빽뺵하게 채우는 시간보다는, 조금은 여백을 남겨두고 빈들에 머물 수 있는 내려놓음의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빈들에 몸소 찾아와 주실 것이라 약속하신 믿음이 그 여백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빈들에서의 은혜 사건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속한 공동체는 요즘 사회참여 프로젝트를 자발적으로 현장발굴을 통해 신앙인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의 현장에 참여하면 좋을지 고민중에 있습니다. 그 아이디어의 전신을 신앙의 관점으로 찾아보고자 누가복음과 신문 읽기를 병행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분석과 신앙적인 해석훈련을 통해서 참여하는 실천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안에는 다양한 예수님의 생애의 활동들이 나오지만,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구조를 통해 읽을 수 있는 포인트들이 누가복음이 주는 매력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빈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사건을 우리에게계시해 주고계십니다. 마음의 귀를 열고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희망을 깊이 묵상하는 빈들이 오늘 여기에 우리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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