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2-17, 21-26 묵상
<새번역>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베드로가 그 신도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직무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서,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다.
오늘의 묵상말씀 본문은 사도행전 1:12-17, 21-26절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장면이 시작됩니다. 예수의 생전에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가족들, 또 예수의 말씀을 사모하던 신도들까지. 그 수가 백이십명쯤 이르른다고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적이는 광경은 언뜻 떠올려보면, 소음과 불안, 그리고 혼란으로 가득했을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희망으로 삼고 그가 가져올 새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마도 모두에게 믿기지 않은 현실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무함과 절망으로 가득찼을 공기 가운데 사도행전 1장의 묘사는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갑니다. 다양한 곳에서 모여든 각기 다른 이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누가 리드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번째 장면은, 기도하는 무리 가운데 조용히 일어난 베드로가 이끄는 회의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이제 의미가 없어진 공동체를 해체하는 수순을 밟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공동체의 화두는 바로, 유다가 저버리고 간 직무인 ‘부활의 증인’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포기하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라는 직무를 이어나가 희망의 공동체가 되겠다는 암묵적인 공동합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 이전에, 어떤 동기부여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일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그러고나서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후보 가운데 제비뽑기를 하여 한 사람을 선출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두 사도라는 직함은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닐 거라는 예상을 해보는 가운데, 이렇게 중요한 직무와 직분의 자리를, 제비뽑기라는 랜덤으로 진행하는 장면 또한 예기치 못한 반전인 것 같습니다. 제비뽑기는 과연 어떠한 신학적 의미를 가질까요?
이렇게 크게 나누어 세 가지의 장면은 각각 예상치 않은 전개로 보이지만, 모두가 “기다림”과 “희망”이라는 화두로 연결되어 집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이 바로 희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희망의 반댓말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희망이라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그 상태를 포기함이 바로 반희망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시련이 닥치면 누구나 마음과 몸이 연약해집니다. 우리는 시련의 고통 앞에서 누구나 연약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렇게 약해서 쓰겠냐고 쓴소리를 해서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는 아픈 상처의 회복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곪게하여 덧나게 하는 것일 겁니다.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그만 슬퍼하고 상황을 직면하여 해결하라는 말은 어쩌면 위로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잇는 가장 손쉽고, 위로 당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폭력적인 위로가 아닐까요.
잠시, 오늘의 고통의 자리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속되는 전쟁과 불의한 탄압으로 오랜 시련을 견디어내고 있는 이웃들, 또 미리 사회적인 대비를 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생명들의 시간을 우리는 함께 지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 교인분들과 함께 방문했던 이태원 추모의 현장에서 발견한 짧은 추모글을 읽고 한동안 침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