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26-42 묵상
성서본문 요한복음 4:26-42
26.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 때에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무엇을 청하셨는지 또 그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29.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렸다.
30.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 모여들었다.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36.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을 받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알곡을 모아들인다. 그래서 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37. 과연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는 속담이 맞다.
38. 남들이 수고하여 지은 곡식을 거두라고 나는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였지만 그 수고의 열매는 너희가 거두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9.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40. 예수께서는 그들이 찾아와 자기들과 함께 묵으시기를 간청하므로 거기에서 이틀 동안 묵으셨는데
41.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하고 말하였다.
성서일과에 따른 오늘 주일 본문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우물가에서의 대화를 나누셨던 장면 바로 뒤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대화장면 뒤에 나오는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이외에 두 그룹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와 사마리이 여인의 동네 사람들인데요, 이 두 그룹 사이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 당시 관습에 따르면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 그것도 죄 많다고 소문난 여인과 대화를 섞는 행위는 부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예측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예수님이 달갑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이 본문에서도 드러나있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 전혀 질문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오랜 시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는데도 제자들은 그 대화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중요하지 않은 대화의 내용으로 간주하게 되는 태도를 가진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대화를 마치고 온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오랜시간 대화하느라 밥을 드시지 못했을 예수님의 허기를 걱정하는 질문만 합니다. 피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제자들을 꼬집기 위해 예수님은 양식에 대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보이는 양식에만 사로잡혀, 누군가가 몰래 예수님께 먹을 것을 드렸나 하고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생명의 양식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34절 본문을 보면, 그 양식을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양식은 생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누구든 밥없이 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체적 허기짐 뿐 아니라 그 너머의 충만한 채워짐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양식에 대해서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는 일이 바로 궁극적으로 생명을 구하는 양식이라고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양식은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첫 번째 방법을 본문 바로 이어서 설명을 시작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 먼저 깰 것을 요청합니다. 35절 본문의 말씀을 보면,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시간 관점에서 추수의 때는, 씨앗을 심고 거두는 데 일정기간이 소요됩니다. 넉 달이 지난 다음에 도래하는 추수의 때가 오기 전에는 누구도 추수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추수의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음을 이야기 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예측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한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에 올 수 있습니다.
누구든 생존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이는 생존의 방식에만 집착하면 그 너머의 하나님의 시간을 내 생각의 한계로 고정시키게 되고, 하나님의 추수 때를 경험하지 못하고 끝나버리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궁극적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추수 때를 볼 줄 아는 지혜가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바라볼 줄 아는 자들이 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신 겁니다.
본문에 나온 ‘보이는 양식’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양식, 즉 생명의 양식을 향해 힘써 집중해야 하는 때가 청년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청년은 인생의 주기로 보아서는 낯선 세상과 마주하여 다양한 것을 받아들이는 시기이자 자신만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는 시기입니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하고, 그로 인해 경험하는 자유를 누리고 그에 따른 책임감을 훈련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삶은 무섭기도하고, 예측불가능한 것만 가득한 불안한 세계이기도 하니까요. 이 시기에 놓인 청년들에게는 용기가 많이 필요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낯선 것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힘겨워 때로는 배척하거나 회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용기를 가지고 낯선 것들을 환대하고 삶으로 받아들일 때, 나 홀로의 좁은 인식에서 벗어나 더 깊고 충만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위한 양식 뿐만 아니라, 영혼의 허기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생명의 양식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해 우리 서울제일 청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난 6주동안 나눴었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었는데, 잠시 화면을 보실까요?
친구되기 경청하기 교회참여하기, 사회적 희생자들의 현장을 발로 찾아다니기, 의료계나 인종차별 이슈에 직업적 소명을 가지고 참여하기, 교회와 학교에 자신의 재능으로 참여하고 선한 영향력 주기,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 꿈꾸기, 타인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영성의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여러분 우리 청년들 참 멋지죠? 요즘 MZ세대라는 말로 청년들을 자기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들로 폄하하는 경향이 미디어 담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을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은 특정 프레임에 가두어서 청년들의 가능성을 발현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억압의 장치 입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과 성서본문을 묵상하고 나누면서, 신앙인이 되기 위한 자신들만의 다양한 모양의 정체성 고백을 듣는 것 만으로도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각자의 개인적인 고민들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지 느껴 지시나요? 청년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지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청년들 역시
주변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고, 자연을 파괴하거나 동물을 학대하거나,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직장내 괴롭힘을 볼때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
고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마주하는 의외의 도움들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랑이 느껴질 때 다시금 마음을 회복하고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청년들의 고백 앞에서 저도 많은 깨우침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청년들의 고백이 여기 계신 성도님들 모두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살아가는 현실 가운데, 때때로 보이는 세상 앞에서 실망하고 조급하고 사랑이 메말라 각박해질 때도 있지만, 우리는 보이는 세상 너머의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해봤고, 그런 은혜를 늘 선물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을 크고 작게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 은혜의 사건 덕분에, 우리는 고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밑거름들 덕분에 더 나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을 품고자하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며 나의 생존만을 위해 사는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착각하며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신앙인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이는 너머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 기쁨의 체험은 편안한 나의 자리만 고집하는 것보다는, 이웃과 함께하는 ‘청년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하게 만들 것입니다.
청년의 때를 보이는 방식으로 생각하면 인생의 젊은 시절인 한 때로 여기게 됩니다. 신앙적인 관점의 청년은 젊은 나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시간관념으로 보면, 청년이란 인생의 한 주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온 시기를 생명의 양식에 집중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은혜 충만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청년 됨”은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진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넘어가서, 예수님의 거두는 이와 심는 이에 대한 비유를 통해 청년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인 두 번째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 농사를 지을 때 심는 자가 중요할까요, 거두는 자가 중요할까요?
예수님은 거두는 사람들은 이미 심는 사람들 덕분에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는 기쁨을 얻었다고 선포하십니다. 비유로 드신 37절의 속담처럼 거두는 사람과 심는 사람이 다른 것이 언뜻 보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심는 사람이 수고롭게 일한 노동을 생각해보면 거저 얻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 거두는 자들이 불공평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는 자들은 혹여나 있을 장마나 홍수를 걱정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땀을 흘리며 심을 것입니다. 허리를 굽혀가며 땀흘리는 고된 노동이지만, 하나하나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심을 것입니다. 거두는 자들 역시 심는 자들의 노고와 어려운 과정을 견뎌낸 것에 감사하며 풍성한 수확의 기쁨으로 추수하는 노동을 감당할 것입니다.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마음을 합쳐 기뻐하는 때는 바로 열매들이 알알이 모든 풍파를 다 견디고 건강하게 풍요롭게 임무를 완수했을 때 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자리에 모인 우리를 거두는 자들로 임명하셨습니다. 이미 심는 자들의 수고로움을 통해 거두는 자들은 그 삯을얻었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초대되는 알곡들로 모였음을 알려주십니다. 심는 자는 바로 이 초대의 과정을 위해 헌신한 예수님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심는 자의 헌신이 없었다면 거두는 우리는 아마도 생명의 나라 기쁨을 얻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심는 자 역시 거두는 자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으려면 거두는 자들이 열매를 잘 거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이 둘의 주체는 서로 상관없는 다른 주체들 같지만,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쪽만 성공한다고 기뻐할 수는 없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비밀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심는자와 거두는 자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두번째 방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같은 곳을 향해 희망을 품고 서로가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품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울때 우리는 같이 소원했던 꿈을 이루고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함께함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됨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각 몸들은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몸은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교회 됨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을 발견할 때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세 번째 방법은,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동네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동네 사람들은 예수와 직접 대화한 여인의 말만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들과 함께 이틀동안 머물고 나서 직접 예수의 말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신앙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질문하는 자기 것이 없는 믿음은 수동적 신앙인에 머물게 합니다. 수동적인 신앙에 익숙해진 사람은 창조적인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저 관습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교회생활 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직접 함께 거할 것을 요청 드리는 적극적인 신앙인들은 자기 스타일의 신앙을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몇 시간 대화한 것 만으로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더 머물도록 요청하는 용기를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새로운 양식에 대한 갈급함과 은혜의 시간을 경험하고 싶은 간절함을 가지고 한계를 뛰어넘는 해방을 시도했습니다. 계급적 관점을 가진 보통의 유대 남성으로만 예수를 바라봤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방의 희망으로 예수께 요청했습니다. 앞서 본문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당연한 게 너무 많았던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와는 현격히 다른 자세를 사마리아 동네사람들은 보여줍니다. 당연한 것을 뛰어넘는 해방의 용기가 바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이렇듯 자기만의 신앙 스타일로 하나님과 소통할 줄 알아서 자기 것이 생긴 자들에게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요청할 줄 아는 신앙의 자세는 고유한 나의 신앙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더욱 깊이있게 끌어내 줄 것입니다. 신앙을 통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때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즐거운 자기가 되어야, 즐거운 교회 됨이 가능합니다. 내가 행복해야 함께 거두고 심는 모두가 행복한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만 하면 억울하고 불행한 자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원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사마리아 동네사람들처럼 진정한 행복을 구하고자 하는 개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신앙을 구하고자 할 때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생명의 양식은 이웃을 환대하는 교회됨이라는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는 자기가 되어야만 풍성한 채워짐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 됨의 포인트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 어떤 진해산미보다 더 풍미와 깊이가 있는 생명의 양식을 기쁘게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생명의 양식을 발견하시기를 주님께 구해봅니다.
오늘 청년주일의 주제는 “나는 청년 교회”입니다. 생명의 양식은 나이나 성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나와 다른 낯선 것들을 환대하는 청년의 자세여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양식은 보이는 시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건이 우리에게 임해질 때 경험할 수 있는 충만한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심는 자가 되셨으며, 우리에게 그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거둘 수 있는 교회됨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연한 걸 깨뜨리고 직접 해방의 용기를 가지고 자신만의 신앙을 하나님께 끊임없이 요청드릴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기쁨의 상태인 청년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를 통해 우리 모두 “나는 청년 교회입니다.”를 고백하는 은혜의 시간을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