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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하는 돌멩이 Aug 15. 2024

신앙이 주는 기쁨

사도행전8:4-40

오늘 사도행전 8장 본문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마술사 시몬과 사도 빌립,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에티오피아 내시, 그리고 많은 군중들이 등장하지요. 저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을 감상할때 캐릭터들의 마음을 상상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감상을 하는 편입니다. 작품의 메세지에 몰입할 수 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성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에 감정이입을 해서 성서읽기를 시도하면, 조금 더 이야기에 몰입해서 메세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읽기를 마치고 난 후 이야기 속의 메세지를 발견하는 작업은 본문을 충분히 이해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말씀이 우리를 부르는 자리에 온전히 집중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이 긴 만큼 제가 다시한번 시몬과 에티오피아 내시라고 나온 두 사람을 대조하며 작품 속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보겠습니다.

시몬은 이미 그 동네의 유명인으로 화려한 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큰 자든 작은자든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그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칭송했고, 그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고 과시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자신감에 꽉 찬 눈빛과 행동으로 그는 어쩌면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의 소유자 임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빌립이라는 어떤 유명한 사도가 사마리아 마을에 등장합니다. 그는 성령의 이름으로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명성이 날로 높아져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이  시몬의 귀에까지 닿아 시몬은 빌립이라는 사람을 만나보기 위해 열심히 찾아갑니다. 빌립의 행적을 보고 매혹된 시몬은 그에게 세례를 요청하고 받게 됩니다. 시몬에게 어쩌면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행하는 병고침의 기적들은 자신이 펼치는 마술 보다도 훨씬 큰 능력이라고 여겼기에, 그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전수받고 싶었을 겁니다.

얼마 뒤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큰 선지자들이 사마리아 마을에 당도하여 안수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성령을 전파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행에 민감한 시몬은 다시한번 그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이 성령받음을 목격한 시몬은 그들을 향해 제안합니다. “제가 돈을 드릴 터이니 저에게도 안수를 주어,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누구도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시오.”

그는 어쩌면 성령이라는 것이 마술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큰 일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시몬입니다. 그 큰 성령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게 되는 게 시몬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에 그는 돈을 내어서라도 이 능력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했던 시몬의 행위는 베드로에게 큰 화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사는 것은 마음이 바르지 못한 행동이고, 불의한 사슬에 있는 일이라고 베드로는 아주 냉정하게 시몬을 꾸짖습니다. 어마어마한 꾸짖음을 들은 시몬은 베드로를 향해서 간청합니다. 스스로 불의에 놓인 자가 되고 싶지 않은 시몬은 베드로를 향해 간청하며 이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간청하는 시몬을 향해 전심으로 회개하고 기도해야만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 사도행전의 저자는 시몬의 이야기를 더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광야 길을 걷고 있는 빌립이 등장하고, 빌립이 길을 걷다 우연히 보게 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는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저자의 의도가 두 이야기를 같이 배치시킴으로써 무언가 메세지를 전달해주는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본문에 이름도 안나온 에티오피아 내시라는 사람은 여왕의 국고관리인으로 현재정도 따지면 재정부장관 정도의 지위가 높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고위급 관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길에 앉아 잘 해석되지 않고 있는 이사야서를 붙잡고 끙끙대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인상적이었던 빌립은 이름모를 그 자에게 묻습니다. 이 책을 읽고 깨닫고 있는 바가 있는가? 하고.

그렇게 말을 건넨 빌립에게 고전하던 그는 묻습니다. “지도해주는 자가 없는 데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내 옆에 앉아서 이 말씀을 해석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가 어려워하던 구절은 이사야서에 나온 구절로, 누군가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겨지는 절망스러운 묘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본문에 나온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빌립은 그에 관한 답을 예수에 관한 설명으로 자연스럽게 이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궁금증을 해결한 에티오피아 내시는 주변에 있는 강을 보며 내게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고, 함께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기꺼이 세례를 주고받는 둘의 장면 후에 기쁘게 길을 걷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두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먼저 두 사람 모두 성령의 능력을 믿고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지만, 성령을 구하는 목적과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시몬은 마술적 능력처럼 성령의 능력도 기술적 전수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달려가 세례를 받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안수를 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귀한 성령을 어떻게든 얻으려고 돈이라도 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시몬이었기에 성령의 위력만 얻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영원히 머물게 할 어떤 위력이 있을 것이라 그는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인기와 명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성령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령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소유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생각이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려고 했던 그의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속성은 온저히 나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기에 돈을 지불하여 성령을 획득하려고 했던 시몬의 욕망과 맞닿게 됩니다.

성령의 속성은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관계없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성령의 본질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성령의 능력은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본질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집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방식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되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술사 시몬은 반대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노력하고 이미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전수를 받아야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시몬은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성령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가고 돈을 써가며 성령을 구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의 우리 신앙생활도 시몬과 비슷한 점이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신앙을 입증하는 행위에 애쓰는 모습들, 혹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다 했다고 믿는 모습들이 바로 시몬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부르신 곳에 기쁨으로 가는 내가 아닌, 내가 부르는 곳에서 하나님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에테오피아 내시의 모습을 살펴볼까요? 그는 꽤 높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말씀이 부르시는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길에서도 말씀과 씨름하는 첫 장면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성령의 지혜가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지혜는 나의 능력에 있음이 아니라, 온전히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방향이 나로부터가 아니라 부르시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부르시는 자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이를 구하고 있었고,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주저없이 말씀을 가이드해달라고 빌립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가 궁금해했던 본문의 메시지 역시 아주 본질적인 물음이었습니다. 이사야에서 묘사하는 그 세상을 구할 메시아가 그래서 누구인가?

내가 구원 받기위해 혹은 성령을 받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세상을 구할 메시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시몬과 에티오피아 내시가 달라지는 아주 중요한 질문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비참한 죽음이 무엇으로 비롯되었는지에 관한 핵심적인 질문을 그는 던지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구원이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로부터 시작됨을 분명히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애썼고, 이 지혜를 가르칠 수 있는 빌립을 만나자마자 대답을 구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지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에티오피아 내시는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부르신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그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인상적으로 끝납니다. 바로 기쁘게 그 길을 갔다는 저자의 묘사입니다.

8장 4절 첫 시작도 사마리아 군중들이 빌립의 기적을 보고 기뻐했다라고 시작했고, 마지막 에티오피아 내시가 모든 과정을 마치고 길을 걸어갈때도 기뻐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기쁨이 함께 해야 합니다. 반면, 시몬은 성령을 구하고 있음에도 불안해하고 간청하고 돈을 꺼내기도하고 매달리기도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나의 능력이 구원과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에 더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성령을 구하고자 한다면,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온전한 기쁨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이는 나의 자리와 나의 능력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온전한 기쁨을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로부터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쁨이란 그런 점에서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충만한 존재로부터의 기쁨을 우리 삶에 가져다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신 자리에 온전히 집중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온전한 성령의 기쁨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라고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잠시 작품 한 점을 감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뱅크시라는 익명의 작가로 알려진 사람의 영국의 한 항구도시에 남겨진 벽화입니다. 뱅크시는 크리스마스에 벽화를 남기고나서 자신의 SNS 계정에 “눈송이가 내 머리위로 떨어져요”라는 노래를 배경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누가봐도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아이의 모습인 것 같죠? 하지만 이 작품을 멀리서 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맞닿는 다른쪽 벽에는 쓰레기를 태운 재가 흩날리는 장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뱅크시가 이 작품을 이 도시에 선정한 이유는 세계보건기구가 대기오염이 심각하다고 발표했다가 다시 정정한 소동이 벌어졌던 철강으로 유명한 한  마을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기 위함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하얀 눈송이처럼 보이는 것을 활짝 웃으며 온 몸으로 맞이하는 아이의 순수한 표정 너머에 있는 대기오염이 난무한 도시의 현장이 어쩐지 큰 대비로 인해 씁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한다”  

거리의 예술가라고 불리는 뱅크시(Banksy)라는 작가가 남긴 말입니다. 예술이 부자들만 향유하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현상에 대해 평생에 걸쳐 비판하는 예술을 해온 그의 작품들은 여러 부분에서 소외의 자리를 바라보는 지혜를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예술’이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신앙’이라는 말을 넣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 나를 부르신 자리를 온전히 집중해서 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필요한 불안하고 연약한 자리로 우리를 부르신 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은 바로 부르신 자리에 우리가 온전히 참여할 때 주어질 수 있습니다. 나만 편안하고 안락한 기쁨을 추구하는 자리에는, 아쉽게도 불안이 항상 따라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예측하고 계획한대로 삶은 흐르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연약한 존재들은 생존을 명분으로 가진 것을 잃지 않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스스로를 더 불안한 자리로 내모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를 지키기위해 나를 소외시켜야만 한다는 불안정한 기쁨이 지금의 우리 시대에 만연한 마술인 것 같습니다.   

불안정한 나만을 위한 기쁨이라는 마술에서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부르신 자리가 어디인지 집중해 보시고, 성령의 기쁨에 참여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함께 누리는 기쁨이라는 선물을 얻으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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