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출판의 자유가 있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출판을 책을 만들려면 누군가의 ‘허가’를 받아하는 게 아니라 ‘등록’을 하고 절차만 거치면 누구나 출판사를 열 수 있다. 또 출판사라는 형식이 아니어도 출판을 할 수 있다. ‘독립출판’이 그것인데 출판사에 등록돼 소속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출판물을 만든다 하여 ‘독립출판’이라 한다. 이 ‘독립출판’의 경우 ‘기성출판’의 유통 경로와 문법을 따르지 않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독립북페어와 같은 기존과는 좀 더 다른 경로로 독자를 만나기도 한다. 고로 출판을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출판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되고 생각보다 이건 꽤나 큰 자유고 능력이다.
그러나 이 출판의 ‘자유’를 우리는 얼마 전 빼앗길 뻔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가장 먼저 막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출판의 자유’였다. 글로써 자유롭게 말하고 떠들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
다소 황당하면서도 어처구니없었던 그날의 ‘선언’은 그동안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누렸던 이 ‘출판’의 권리에 대해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했다. 외부에 의해 강제로 제한된 출판의 권리라니. 내가 늘 매일같이 하던 이 일이 누군가에게는 권력이 될 수도 있고 그것도 보기에 따라선 칼날의 앞뒤면과 같은 위험같이 느낀 사람이 있었다니. 출판을 하던 나로서는 이 ‘출판’에 대해 좀 더 조심히, 책임감 있는 출판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출판’이란 것의 미래까지도.
어찌 됐든 지금으로선 추정할 수밖에 없는 미래이다. 미래는 동시다발적으로 지금부터의 행보에서도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정을 해보기로 했다.
인류가 ‘출판’이란 것을 발명하고 그 역사를 만들어가기까지 사실상 핵심 프로세스는 바뀌지 않았다. 글을 쓰고 그것을 인쇄술이라는 것의 기술을 빌려 다량의 출판‘물’로 찍어 배포한다는 것.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쇄‘술’만큼은 시시각각 바뀐 것도 사실이다. 인쇄술의 변화로 인쇄로 가는 과정의 것들도 같이 많이 변했다. 사람의 손에서 기계로, 기계를 쓴다 해도 점점 사람의 손이 최소한으로 사용되는 방향으로 말이다. 단 몇십 년 전만 해도 식자공이라 하여 신문과 같은 매체는 직접 글자를 뽑아 배치하던 직업이 있었던 것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그 과정을 약간의 사람 손을 거친 인쇄 기계의 손을 거치고 있으니까.
과연 이러한 변화가 사람의 손을 어디까지 필요로 할 것인가. 단순히 인쇄‘술’에만 그칠 것인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역할에까지 이를 것인가. 실제로 챗gpt의 글로만 작성된 책이 출간되기도 했으니까. 그 역할조차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호기심으로 애플의 새로운 제품 중 하나인 ‘애플비전’이란 것을 체험해 봤다. 언젠가 공상과학 영화에서 봤을 법한 증강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해진 나의 생각과 눈빛으로 많은 것을 조절할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기계 말이다. 지금 상태의 ‘애플비전’은 다소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일단 이것을 체험하는 나조차 이 존재에 대한 숙지가 되지 않았고 그랬기에 기계와의 합도 좋지 않았다. 안구의 움직임으로 움직이는 이 기계가 수없이 움직이는 동공의 움직임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데는 아직까진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인간은 기계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업데이트해서 전에 없던 그 ‘물건’을 누구보다도 필요 있는 ’물건‘으로 재포지셔닝하는데 천재니까.
이렇듯 지금의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부터 꿈꿔왔던 그 물건들은 어느새 내 삶 안에, 내 직업 안에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고로 이 흐름 자체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등장으로 인류의 ‘일’은 재정의 될 것이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직업에 대해 권해줘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돈 그 자체일 지경이니까.
이게 출판과 무슨 상관이 있냐 하면 상관이 있다. 나는 이를 가까운 나라 일본의 서점에서 관찰했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한국’이 보기에 다소 기이한 면이 있다.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면서도 의외로 빨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직도 현금을 고집해서 기계를 쓰더라도 현금을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의 서점에서 발견한 점은 이 나라가 의외로 ai의 기술과 이미지에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는 이들이 각종 애니메이션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 뭔가가 왜곡돼 보이는 그런 기묘한 불쾌감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점도 일부 기인해 보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ai가 만든 이미지로 만든 책이 서점, 길거리의 포스터에 가득했다. 또 이 나라는 가성비를 중시하여 누구보다도 규격을 잘 지키는 데 이렇게 규격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은 거꾸로 일괄적인 변화도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읽힐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규격이 있다 해도 정확한 치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예를 들면, 출판에서 자주 쓰는 신국판의 경우 가로가 150mm에서 153mm 이상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여기서 나오는 경우의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판형만 해도 이 정도이다) 이는 일괄적인 기술의 반영을 어렵게도 만든다. 결국 누군가가 나서 탑다운 방식을 강제하지 않는 한 통일된 무엇을 강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의 일괄적인 반영과 발전, 변화를 어렵게 만드는 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이렇게 눈앞에 다가온 기술이 경험을 대신해 주는 세상에서 우리가 출판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에 점령당하지 않고, 때론 그 기술을 이용한 권력에 점령당하지 않고 우리의 목소리를 지켜가며 출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기술과 생각까지 기계가 대신해 주는 사회라면, 그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 변화에 유연하고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그 변화에 맞춰 적용할 수 있는 사람. 물론 그건 뚝심과도 같은 일일 수도 있다. 뚝심을 한낱 꼰대들의 고집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 사회에선 유난스럽게 별난 행동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변화의 한가운데서도 그런 유난스러움이, 시끄러움이, 변화에도 내 생각과 할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출판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기술은 계속 변하겠지만 결국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또 읽는 것은 사람이 될 것이다.
다소 허무한 결론이지만 그렇다. 그렇게 ’생각‘은 ’출판‘이 되고 ’기록‘이 되고 ’언어‘가 된다. 그래서 ’나쁜‘ 권력자들이 제일 먼저 막고 싶었던 것도 ’출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대가 어떻든 제발 사람들이 많이 떠들도 출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인쇄물로 마구 찍어댔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기술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 기술을 이용해 더 많이들 떠들어대길 바라고 있다. 출판의 미래는 거기 있을 것이다. 결국은 사람들의 의지이고 생각. 그러니 우리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위해 많이 출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