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집‘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전집 반대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전집‘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취학 전후의 영아에 가까운 어린이들이 주로 보는, 한 두 가지의 주제를 여러 권의 책으로 묶어 놓은 시리즈 기획물을 말한다. 오죽하면 지금 일하는 도서관에서 만나는 봉사자를 볼 때마다 처음 물어보는 말이 “혹시… 전집 좋아하세요?”였을까.
나의 전집에 대한 기억은 이러하다. 내가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이었던 시절 가끔씩 수업 시간이나 하교 직전 불시에 방문하는 누군가가 어떤 장난감류를 소개해 준다. 장난감에 대한 여러 시연을 한 뒤 그는 말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갖고 싶으면 이 전집을 사셔야 해요. 이 전집은 책 여러 권을 묶어 놓은 건데, 이게 어떤 내용이냐면…”
장난감이 흔치 않았던 1990년대에 이미 그의 말은 아이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장난감 가게에선 절대 팔지 않을 테고 퀄리티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아도 어쩐지 ’그냥‘ 갖고 싶은, 그래서 “나 ’그거’ 샀어.”라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것이 갖고 싶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알을 깨고 박차고 나와 걸어 다니는 공룡 인형(피규어)였다.
평소 엄마의 강직하다 여길 정도의 검소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과연 그 ’장난감’을, 거기에 포함된 몇 십 권의 책을 가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고, 평소와 달리, 그것도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그 ‘공룡’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공룡’이 들어온 순간 책의 내용이 뭔지 나로서는 알 필요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보기엔 다소 어이없었을 일화이지만 어린이였던 나에겐 너무도 당연하고 성공적인 쾌감의 기억이 있던 사건이었다.
이렇게 ‘전집‘에 대해 잊고 살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전집’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왔다. 내가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내용이 어떻든 ‘공룡‘님이 중요했던 나는 그 사이 책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간 본 많은 것이 있었다.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본 여럿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전집’의 순기능은 상실했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여럿 있지만 몇 가지만 밝히자면,
첫째, 모든 일의 인과 관계, 특히 인물의 서사에 관해서는 그것이 실화를 기반한 것이라도 ‘반드시‘라던가 ’운명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일화는 그 사람만의 것일 수 있는데 오랜 시간 우리(전집을 만드는 사람들, 부모들과 같은 어른)는 이것을 너무 간과했다. 내가 어린이였던 1990년대 유행했던 ‘위대한 인물 전집‘은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다. 그럼에도 계속 외형을 바꿔가며 출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고 봐도 과도한 측면이 있다. ‘인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재정의되기도 하고 기대 수명이 길어진 요즘 같은 시대엔 한때 훌륭했다 여겨지는 인물이라도 추후에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시대가 됐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래서 길게 봐야 하는데 그런 시각은 부족해 보인다. 일단 성공(대부분 경제적 성공)하면 된 거 아닌가 하는 시각도 어딘가 불편하다.
둘째, 지금 시대는 검색의 시대이다. 굳이 검색과 각종 인터넷 사전에 등재된 자료를 두고, 한 번 검증을 거쳤다고는 하나 ’인쇄’라는 물리적인 과정을 거쳐 그 과정에서 다소 왜곡되거나 생략, 축소되는 정보값의 결과물을 굳이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셋째, 같은 흐름의 책을 여러 권 읽는 것이 분명 좋은 것은 사실이나 그 몫은 독자와 보호자가 충분히 해낼 수 있고 그렇게 유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큐레이팅을 넘은 ‘전집‘의 일관된, 때로는 일반화되고 납작하고 평평한 기준으로 획일화되는 기준은 조금 위험해 보인다.
만약 ‘곤충’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아이가 그 ‘곤충‘에 대해 30권의 책을 읽는다 치면 30권의 같은 시리즈를 읽는 것보다 각각 출판사가 내놓는 20여 권의 책을 섞어 읽는 게 더 적은 양을 읽는 것 같아도 더 다양하고 새로운 시각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 정해진 예산에서 적게는 30권 많게는 100권의 책을 그야말로 한날한시에 가래떡 뽑듯 뽑아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책 한 권 한 권에 정성을 다하는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에서 아이들이 무엇보다 책만큼은 그 풍요를 잘 누렸으면 좋겠다.
얼추 세어봐도 나의 불만 아닌 불만은 서너 가지가 훌쩍 뛰어넘는다. 그래서 우리 집 어린이의 책장에는 전집이 없다. 정확히는 없었다. 그러다 하나 생겼다. 바로 ’디즈니 어린이 전집 복각판(1982년 판의 재인쇄판, 이하 디즈니 전집으로 표기)‘.
사실 이 전집을 사기까지 배우자와 기나긴 토론을 했다. ’가격이 비싸다‘, ’나는 1980~90년대 디즈니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등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내가 그 전집을 사기 싫은 이유는 ’전집‘이 싫어서였다. 피 튀기는 격론 속에서도 나는 결국 졌고 우리 집에 그 ‘디즈니 전집’은 들어오게 됐다. 그러면서도 아이 방에서 그 책 더미를 볼 때마다, 아… 저것만은… 아이가 들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내 바람이 통했던 건지 아이도 그 책들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나이가 좀 들더니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내용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더 이상 파도와 노는 여자 어린아이가, 나는 강물처럼 말해서 천천히 말한다는 아이의 이야기가, 아빠가 몰래 숨겨둔 공룡 장난감을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고 생각하는 티라노 사우르스의 이야기는 재미없다고도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싫은 ‘디즈니 전집‘을 아이에게 읽어주어야만 했다. 아이는 내 무릎에 앉아 깔깔대며 책을 즐겼다. 그래 그럼 됐지… 하면서도 불만의 마음이 솟아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식 라이선스(저작권)를 취득한 지 어쩐 지도 모르겠고, 추억을 반영했다는 데 어떤 것은 수작업, 어떤 것은 컴퓨터 폰트로 일괄 작업한 것도 맘에 안 들었다. 요즘 말도 많은 PC함(Politic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각종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언어, 정책 등을 지양하자는 신념 또는 이를 바탕으로 추진되는 사회 운동)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콘텐츠라 어디서나 담배를 찍찍 피고 어린이와 동물들에게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언어와 행동을 하며, 착한 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자꾸 착하게 살라는 듯한 애매하고 서둘러 끝맺는 교훈은(앞서서 애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과는 왜 시각이 일치하지 않는지, 시리즈로서의 일관성면에서도 그저 그랬다) 읽어주는 나를 화나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가 좋아하니까 적당히 ‘이런 것은 좀 별로인 것 같….은데…’라고 자체적으로 수위 조절을 하기도 했다.
오늘도 독서 타임이 와서 혼자 속으로 ‘제발 오늘만은 디즈니 전집만은 빼 줘‘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바람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것저것 훑어보던 아이가 그 시리즈 중 전에 보지 않았던 몇 권을 가져왔다. 여전히 여전했지만 어딘가 다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그건 바로 <늙은 나귀 좀생이>.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내용이 예상되지만, 늙은 나귀 좀생이는 착하지만 늙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원래 집에서 키울 수 없게 된다. 좀생이의 사실상 유일한 친구는 얄궂게도 이 좀생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아무도 이 늙은 나귀를 사려하지 않고 혹여 구매자가 나타났다 해도 이 나귀를 키워줄 사람은 없었다. 늙은 나귀의 쓸모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소년과 나귀가 절망하던 순간, 어떤 가난하지만 젊잖은 신사가 나타나고 나귀를 데려간다. 그리고 소년의 바람대로 나귀를 귀하게 여기고 잘 먹이고 잘 보살필 것을 약속한다. 그 신사에게는 늙어서 힘이 없어도 가죽이 멋지지 않아도 임신한 아내와 함께 가는 길을 조심히 잘 도와줄 나귀가 마침 필요했던 것이다.
소년은 그저 나귀 좀생이가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돌아갔지만 나중에 그 나귀가 귀한 일을 하게 될 거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늙었지만 그래서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책에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 신사는 추후 예수의 아비 요셉이었을 것을 암시한다. 좀생이는 마리아를 태우고 마리아가 낳을 아이를 위해 일하게 된다.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해서 멸시받지만 결국 가장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 이 책은 ‘디즈니 전집‘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 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전집‘은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서관에 기증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전집들은 보면 어쩐지 답답한 마음도 든다. 그래도 이 많은 책 중에 좋은 책이 몇 권 숨어있다는 사실은 알게 되어 좋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생각한다. 그리고 바라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것을, 좀 더 제대로 된 것을, 좀 더 정성 들인 것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출판사 입장에선 매출을 생각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식은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중에 아이가 커서도 그 수많은 시리즈, 전집 중에 몇 권은 두고두고 볼 수 있게 되었으면. 아이가 크자마자 도서관에 버리듯 휙 기증하는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면서 도서관에 쏟아지는 전집을 보며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하는 넋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