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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o Dec 21. 2024

나오시마는 어떻게 갑니까?

안도 다다오 & 쿠사마 아요이

특별한 여행지를 다녀오면

멋진 풍경이나 상황 등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추려보는 습관이 있다.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지만 엑기스만 몇 개 떠올려 보는 식이다.


시간이 지나고 여행의 추억을 되새김질할 때 유용하다. 그 장면들만큼은 단박에 기억나

다른 장면까지 끌고 온다. 글을 쓸 때 글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섬이 하나 있었다.


섬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기억된 쿠사마 아요이의 빨간 호박과 노란 호박 조각상, 지중 미술관, 베네세 하우스 등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들이 둥지를 튼 예술의 섬 나오시마.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때는

막연하게 일본 어딘가에 있는 섬이었다. 섬나라에 있는  또 다른 섬이라 가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도쿄나 오사카, 교토만으로도 만족스러웠으니까.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료를 모아보니 희미하게만 보였던 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달 전, 인터넷 항공사에서 저가로 나온

카가와현 다카마스 행 항공권을 덜컥 예매했다. 순전히, 그 섬에 가고 싶어서.  다카마항 근처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 날 나오시마 섬으로 가는 8시 10분 첫배를 탔다. 섬에 도착해서는 버스를 이용하는 대신 자전거 대여소에서 전기 자전거를 빌렸다.  15,000원 정도를 부담하고 이동수단으로 전기 자전거를 대여한 것은 꽤 근사한 선택이었다. 자전거로 인해 지못할 해프닝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전기 자전거는 처음 타보는 거라 제대로 운전할 수 있을까 걱정 했는 기우에 불과했다. 조작법이 간단했고 일반 자전거라면 낑낑거리고 올라갔을 언덕도 힘 안 들이고 거뜬히 통과했다.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기보다 자전거를 대여한 일은 참 잘한 선택이라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빛과 어둠의 신비한 건축공간 미나미데라를 보고 난 이후 섬의 포구마을 선착장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선착장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포구를 잠시 거닐었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 뱃전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어민들. 눈에 들어온 모든 정경이 평화로웠다. 어민들이 집에서 타고 온 자전거와 오토바이 사이에서 내 자전거를 끌고 나와 천천히 마을 쪽으로 향했다.  골목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 속도 좀 내볼까 하고 운전대 위 레버 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레버가 닿지 않아서 슬쩍 시선을 이동하던 순간 무엇인가가 머리를 꽝 때렸다. 레버가 없었다, 전기 자전거가 아니었다.


 포구에 있던 다른 일반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인이 알기라도 하면 어쩔까. 꼼짝없이 자전거 도둑으로 몰릴 판이었다. 부랴부랴 자전거 운전대를 포구 쪽으로 돌리고 가는데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질주해 왔다. 운전사가 잔뜩 인상을 쓰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며 어떤 상황인지 짐작되었다.


대꾸할 수 있는 말은 한 두 마디뿐. 쏘리, 쏘리. 스미마셍, 스미마셍을 몇 번이나 외치고  손가락을 포구 쪽으로 가리키며 그대로 달렸다. 오토바이도 방향을 돌려 내 뒤를 뒤따라왔다. 선착장에 도착해서 타고 온 자전거를 세워놓고  전기 자전거를 찾아냈다. 배 위에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어부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재 뭐냐고.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서 미소와 쏘리를 연발하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분이 들떠있어정신은 차리고 다녀야지. 그나마  별탈없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자전거를 끌고 다니다가 오토바이를 만났다면 더 황당했을 것이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바로 턴을 했으니 망정이지. 내가 끌고 온 전기 대여 자전거가 없었다면 영락없이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에라도 끌려갈 판이었다. 상대방 자전거가 고가가 아닌 동네 한 바퀴용 자전거였다는 사실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쿠다히데오 소설에 가끔 나오는 황당한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단연코 첫 번째로 꼽을 만큼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될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다음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은 자연경관을 유지하려고 건물 대부분을 지하에 만든 지중 미술관이다.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자연광이 쏟아지는 건축 구조물 자체가 명작이었다.


섬으로 가는 페리에서 나오시마에 대해

이것저것 인터넷 정보를 찾아보다가 지중미술관은 예약제임을 알았다. 저녁에 다카마스 항으로 돌아가려고 계획한 당일 코스였기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미술관 앞까지 가서 발길을 되돌릴 뻔했다. 11시 타임이 비어 있어서 순조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벽과 파란 하늘, 클로드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연작, 빛 자체를 예술로 승화한 제임스 터렐의 작품 등이 기억에 남을 만했다. 미술관내에 있는 카페에서 심식사를 하며 바다를 눈에 담았다.


이 밖에 몸으로 빛을 인식하게 하는 안도 다다오와 제임스 터렐의 작품공간 미나미데라, 오래된 집을 살리면서 그 집안에 집을 지은 것 같은 안도 박물관, 그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던 쇠락한 신사를 개조해 지상과 지하를 유리계단으로 연결한 고오 신사, 미술관과 호텔이 함께 있는 베세네 하우스 등. 나오시마가 한때 구리와 금을 제련하는 제련소가 있던 섬이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섬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 일본의 소도시 다카마스의 진가를 알게 된 것도 이번 여행의 소득이다. 바다의 신 곤피라 상을 모신 신사, 고토히라 궁.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왜 그리 계단이 많은지. 연세가 지하신 노인들께서 끝까지 올라가는 모습 자체가 경이로웠다.


겨울임에도 단풍으로 가을 분위기를 간직한 정원, 리츠린 코엔에서는 후지산 봉우리를 참고해 만들었다는 인공산 히레호에서 바라본 난코 연못과 연월교 조망이 압권이었다. 다카마스 항 근처에 있는 다카마 성터는 기대를 별로 안 했는데 아침 산책에 그만이었다.


전철 패스 한 장으로 전철 왕복 비용과 온천 이용료까지 뚝딱. 현대적인 외관이 돗보인 붓쇼잔 온천도 좋았고 부채로 만든 패스도 인상적이었다.

       

벚꽃 흐드러지게 필 봄에 왔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호젓한 분위기의 여행도 나쁘지 않았다. 대중교통이나 걷기만으로도 충분이 다카마스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평소 우동을 즐겨 먹지 않으면서 거의 대부분 끼니를 우동으로 때운 것도 기억에 남을 일이다. 우동의 고장 답게 눈에 띄는 간판이 우동집이다보니 이 참에 실컷 먹자는 생각이었다.  일 년 치 분량을 3일 동안 해치웠다. 질려도 술술 잘 넘어가는 게 신기했다. 한해를 마감하는 여행으로 과분한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로 인한 해프닝조차 여행의 맛을

감칠나게 한 조미료였다. 담하지만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린다.


새로운 것을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갑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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