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공간. 치과
간만에 치과를 갔다. 치과 진료를 받고 집에 와서 온몸의 힘이 소진된 기분을 느끼며, 고작 30분 남짓한 진료에 하는 것이라곤 입 벌리고 누워있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진이 빠지는가를 고민하다가 발견하게된 치과에 서린 악랄한 내러티브를 고발해본다.
대부분의 치료 행위는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순간적으로 더 큰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마치 할부금의 성격을 가진 고통을 저렴한 이자율로 일시 상환하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리는 그걸 치료라고 부르기로 했고, 다만 위대한 인류는 “마취”라는 미학을 개발하여, 일시금을 내지 않고 할부를 치르는 예술의 경지에 올랐지만 이 마취는 자체로 너무 어려운 프로세스인지라 거액의 할부 상환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왔다. 신경에 닿을락 말락한 애매한 수준의 충치 따위에 혹시 마취하면 안 될까요?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요청하면, 중후한 치과의는 들은 체도 안하며 “떼잉… 요새 젊은 것들은 깡다구가 없어!”하는 눈초리를 날릴 뿐이다. (그렇게 이야기 했다는게 아니다. 그냥 내가 느낀거다.) 그런 지배적인 분위기 앞에서 작은 고통도 소중하게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은 한순간에 유약하고 사치스런 인간이 되어 버린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고 규정하고 있고,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은 사회의 전제 조건이지만서도, 치과 치료의 과정에서 환자의 존엄성은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치과는 생물학적 본성마저 거슬러야 하는 장이 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즐거움을 가까이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할진대, 이 곳에서는 나에게 고통을 선사하기 위한 미지의 철제 기구를 나의 의지로 내 입을 벌려 맞이해야 한다. 마치 누군가의 집에 갔을 때, 그 집의 고양이가 스스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욕조에 입수한다면 우린 그 집의 육묘 환경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치료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어떠한가? 바야흐로 웹3가 이야기되고, 모든 경제 산업 영역에서 UX, 즉 사용자 경험이 강조되다 못해 필수가 된 세상이다. 누군가의 지갑을 털기 위해서 그 사람의 긍정적 경험을 어떻게 형성할까를 항상 고민하는 게 이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체제의 기본적인 원리임에도, 치과는 10년이 넘도록 일관되게 변화를 도외시하고 있다. 사용자 경험 개선의 기본 원리는 고통은 최소화하고 즐거움은 극대화하는 것이지만 이 곳은 진료를 시작함과 동시에 이 원리를 깡그리 배척한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란 게 얼굴을 가리는 천을 덮어 시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극이 사라지면, 다른 자극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가 좋은 음악을 즐길 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혹은 사랑하는 이와 입맞춤을 할 때 왜 눈을 감을까? 바로 가장 좋은 그 감각에 가장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치과는 그렇게 효과적으로 환자가 그 고통을 극대화하여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엄습하는 것은 괴악한 소리와 고통이다. 아마도 어떤 미래에 치과가 UX를 고려하여 노력하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진료를 받는 동안 눈앞에서는 자극을 분산시키는 다양하고도 즐거운 영상들을 틀어내는 그런 치과들이 각광받지 않을까 예상해보기도 한다.
어린이들이 많은 동네의 치과는 한 폭의 아수라장이다. 우는 소리, 공포스런 치과 기구의 소리들이 진료실과 대기실을 구획하는 벽 너머로 들려오는 가운데,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자발적으로 효과적인 고통 전달을 감내한 뒤, 나오는 카운터에서 돈까지 지불하는 그 모든 순간은 치아 관리를 소홀히 한 안전 불감증에 대한 거대한 징벌의 시간이다. (물론 관리를 잘 한 사람도 징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괴하다.) 위대한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는 인간의 고통을 경감하고 즐거움을 늘리기 위해 세계적으로도 역동하는데, 이 치과 시장에서도 어느 유망한 스타트업이 사용자 친화적인 치과 진료를 표방하며, 새로운 치료 경험을 연출하여 거액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