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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04. 2022

눈보라 속 극한의 순례길

#3

  새벽 6시에 눈이 떠졌다. 동시에 나는 순례자가 되었다. 뿌옇게 김서린 창문을 닦아내니 4월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바깥은 깜깜했다.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다른 순례자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까치발로 샤워실까지 갔다. 인기척에 잠에 깨어나 다시 잠에 들지 못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이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식빵 몇 개를 구워서 딸기잼을 꾸덕꾸덕 발라 먹었다. 아직 프랑스 땅인데 왜 바게트나 크루아상이 없는지 좀 의아했지만 어찌 되었건 프랑스에서 먹는 마지막 아침 식사였다. 생장은 피레네 산맥에 있어서 그런지 해가 늦게 뜨는 듯했다. 짐을 모두 챙기고 밖으로 나왔을 때가 아침 7시였는데 아직도 여명은 밝아지지 않았고 찬 공기는 허공을 돌고 있었다. 어제 순례자 센터 프랑스 마담이 나에게 일러준 주의사항이 생각났다. 아직 날씨가 춥고 눈이 올 수 있으니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신경 쓰라고 했다. 또 나폴레옹 길이 막혀있으니 찻길을 따라서만 가야 된다는 주의도 받았다. 


아침 7시 생쟝 피에드 포르


  산티아고로 향하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설렘이 가득 찼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이토록 가볍게 걸은 적은 없었다. 눈도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보는 눈인지, 너무 반가웠다. 내가 사는 남프랑스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아주 가끔 눈이 오더라도 땅에 쌓이지 않고 바로 녹아버려서 지저분해진다. 눈은 나에게 순수함을 가져다준다. 어린아이가 눈을 보고 마냥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그냥 좋다. 그래서 그런지 난 여름보다 겨울을 더 좋아한다. 더운 것보다 추운 게 낫다. 가끔 내 친구들이 겨울을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는데 딱히 대답할 거리는 없는 것 같다. 그냥 내가 겨울에 태어나서? 하얀 세상이 너무 예쁘잖아!라고 싱겁게 얘기할 뿐이다. 순례길 첫날, 눈을 맞닥뜨린 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하늘에서 하얀 축복의 눈을 내려주는 것 같았다. 


  계곡 옆 찻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눈 내리는 소리와 내가 걷는 발소리 그리고 내 옆으로 지나가는 새소리가 어우러져 환상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냈다.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아무 소음도 없었다. 그토록 길에서 ‘부엔 까미노’를 외치고 싶었는데 외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괜스레 호주머니에 있던 내 손을 꺼내 쪼물닥 거리다가 한동안 보지 않았던 휴대폰을 켰다. 어느 순간 내 휴대폰은 프랑스에서 스페인 통신사를 이용하고 있었다. 두 나라 국경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표시가 되어있었을 텐데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나 보다. 


이때는 눈 오는 게 행복했다


  아, 갑자기 눈이 엄청나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눈도 아니고 폭설이었다. 하느님이 하늘에서 밀가루 포대자루를 줄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1분도 안되었는데 내 모자에 하얀 눈이 쌓였다. 앞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내 얼굴을 내리 쳤다. 어느 순간 길가에 염화칼슘을 뿌리는 공무원들이 나타났다. 제설차는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눈을 쓸어 담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경찰들이 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잠깐씩 눈이 그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 눈이 얼어버리면서 기온은 급 하강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간식이나 따뜻한 차라도 담아오는 거였는데! 얼굴을 찌푸리면서 후회만 가득하고 있었다.


  잠깐 허리를 펴고 도로 가드레일에 몸을 기대고 있을 때 어떤 순례자가 내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어디서 왔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하나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회용 우비를 걸친 채 까만 봉다리에 짐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차림으로 길을 걸을 수가 있지? 그런데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지친 나에게 물 한 모금을 건네며 부엔 까미노를 외쳐줬다. 무엇이 그녀를 기쁘게 했을까. 무엇이 그녀의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까. 순간적으로 온갖 궁금증이 내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처음에 눈이 오기 시작할 때 마냥 좋아했던 조금 전 내 모습과 너무 춥고 힘들다며 눈을 원망하는 지금 내 모습이 상반됐다. 첫날부터 이렇게 불평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순 없었다. 다시 눈보라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눈이 점점 많이 온다..


  도로를 따라 걷는 길엔 산길도 종종 나왔다. 아무래도 자동차는 산을 빙빙 돌아가서 올라가야 하기에 순례자들이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빠른 길을 만들어 놓은 듯 보였다. 나는 성질 급한 한국인이라서 당연히 산길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순례길은 폐쇄되었고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눈이 순간적으로 종아리 부근까지 쌓여서 산 길을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딱 한 군데, 경찰도 없고 가지 말라는 안내 표지도 없는 길이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로 뒤쫓아서 그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여전히 눈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길도 너무 좁아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밖에 없었고, 눈 때문에 고른 땅이 어딘지 확인할 수 없어서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아, 너무 힘들었다. 얼마 안 가서 내 몸에 한 톨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온 힘과 정신력을 다해서 발을 떼려고 했지만 상상으로도 발을 뗄 수 없었다. 결국 등산 스틱에 내 몸을 의지한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눈 덮인 피레네 산맥 마을


  몸이 마비가 된 걸까? 아니면 얼어붙어버린 걸까? 아무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이 산길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서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아니,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부를 힘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누가 얼어붙은 내 시신을 발견해서 묻어주기나 할까.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카톡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온갖 불길한 생각이 사라질 즈음, 누군가 내 몸을 세게 흔들었다. 눈을 가까스로 떠보니 한 여자 아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고,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을 내자는 말을 하며 나를 부추겼다. 그리고 자기 호주머니에 있던 츄파춥스 사탕을 하나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사탕 껍질을 겨우 벗기고 알맹이를 입에 넣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토록 맛있는 사탕은 처음 맛보는 것 같았다. 영화나 만화를 보면 마치 다 쓰러져가는 영웅이 에너지를 얻고 벌떡 일어서는 것처럼, 온몸에 당분이 퍼져가는 걸 느꼈다.  


겨울 왕국 순례길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비탈길을 올라갔다. 내가 내면의 힘을 다 끌어올려서 걷는 것처럼 눈보라도 마지막 사력을 다해 내 얼굴을 내리쳤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을 때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론세르바예스 Roncesvalle였다. 론세르바예스는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손에 잡힐 듯 보였지만 한 시간을 더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론세르바예스 수도원 알베르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풀려버렸다. 눈으로 젖어버린 돌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스피탈레로 Hospitalero(알베르게 봉사자)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따듯한 차를 건네줬다. 나는 순식간에 네 잔이나 마셨다. 또 평소에 단걸 잘 먹지 않았지만, 이때만큼은 유럽의 고귀한 귀족 할머니처럼 차에 설탕을 듬뿍 넣고 마셨다. 


  언 몸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을 때, 내 감정과 기억도 되살아났다. 네 번째 찻잔이 내 손에서 떠나는 순간, 7시간 동안 걸어온 길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어떻게 이 길을 걸어왔을까. 미쳤지, 나는 무슨 생각으로 순례길을 시작했는지 후회막심한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날 저녁, 신부님은 미사 강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고생 많으셨죠. 여러분이 이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온 것은 절대 혼자 걸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곁엔 예수님이 함께 걷고 있습니다. 또 옆에 있는 동료 순례자들이 함께 걷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산티아고까지 좋은 길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이 얼어붙은 내 마음까지 녹여버렸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다.



* 순례길 브이로그 보기 : 순례길 폐쇄, 때아닌 폭설을 뚫고 피레네 산맥 넘기

https://youtu.be/uNBxf91SE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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