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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07. 2022

특별한 순간을 걷는 특별한 순례자

#4

  밤새 눈이 내렸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게 사라졌다. 적어도 내 눈으로 본 세상에선, 눈이 세상을 이긴 듯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가려는 순례자도 있었지만, 지붕에 쌓인 두꺼운 눈이 우르르- 떨어져서 겁을 먹은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말로 많은 순례자들이 바깥에 발자국을 남기기 두려워했다. 우리 보고 오늘 하루 동안은 걷지 말라고 보채는 듯 보였다. 나가는 문 앞에서 눈치 보고 있는 순례자들 사이로 직진하는 한 한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나였다.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눈 속에서 죽을 뻔했는데 이 정도 어려움은 ‘겨우 이 정도 일'이었다.  나는 바깥 풍경이 너무 궁금했다. 하얀 눈 속에 누가 살고 있을지, 혹시라도 겨울왕국의 엘사 여왕이라도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낼지 싱거운 생각을 머리에 떠올린 채 마을 바깥으로 향했다. 



  그 순간 마치 내 세상인양, 길 위엔 나 혼자였다. 내 앞으로 가는 사람도, 내 뒤로 따라오는 사람도 없었다. 직선으로 펼쳐진 도로 위에는 덩그러니 나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동물들도 아직 자고 있는지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있는 거라곤 내가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들리는 뽀드득 소리뿐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90킬로 미터라고 쓰여있는 간판, 순례길이라고 파란 배경에 노란 조가비 문양을 그려 넣은 표지판이 그나마 내가 순례자임을 자각할 수 있게 해 줬다. 나는 어떤 순례자인가 (겨우 이틀 차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제 잠깐 만난 어떤 순례자가 떠올랐다. 


  그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는 말을 했다. 꽃이 피어날 4월에 눈이 내리는 건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니겠냐는 거다. 게다가 이 특별함 위에서 걷고 있는 ‘우리는 특별한 순례자’라며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어떤 게 정확하게 특별한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정도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것 말이다. 설사 내년 4월에 다시 눈이 펑펑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순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 찰나의 순간도 추억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무언가 꼭 해야 한다는,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하지 않겠냐는 거다. 그렇다, 나는 지금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렇게 좋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말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맞닥뜨려졌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하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즈음, 다시 한번 등산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다시 한번 아스팔트 길을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마을 하나 보이지 않고 쌩쌩 달리는 자동차만 조금씩 보였다. 순례길이 아닌 차도를 범람하며 순례자들이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자들은 순례자들을 배려해줬다. 내가 손짓으로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운전자는 상향등을 깜빡이거나 경적을 빵빵 울렸다. 도로 가드레일에 앉아 잠깐 기대고 있으면 어떤 차는 잠시 멈춰 서서 물을 주거나 혹시 아픈 데가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산 정상에 올라섰을 때, 자동차를 타고 온 몇몇 관광객들은 산 아래 펼쳐져있는 풍경에 빠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며 정상에 올라섰다. 어느 순간 내 등산용 스틱은 온전하게 걸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나의 고장 난 다리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 다리로 정상에 올라간 게 아니고 등산용 스틱이 나를 끌고 여기까지 올라온 셈이다. 어디든 철퍼덕 앉아서 멍하니 산 아래를 보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물 마실 힘조차 없다고 느끼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스페인 꼬마 아이 세 명이 까르르 웃으면서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가장 첫째로 보이는 여자 아이는 나에게 엄지를 척 올려줬다. 그 순간 내 몸 어딘가에 뭉쳐있던 긴장이 와르르 풀렸다. 아이들은 순례길이 무엇인지 알까, 내가 지금 왜 이 고생을 하며 걷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잠시의 궁금증이 들긴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까 내가 죽을 표정을 하며 여기까지 오르는 모습을 봤을 거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정상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어떤 동양인이 어려움을 이기고 도전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 아이들의 내게 박수를 쳐준 이유를 분석하고 나니 순례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며 이 길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순례길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길만 말하는 게 아니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온 마음으로 순례자들을 배려해주는 현지인들 모두가 순례길이었다. 만약 서울 한복판에서 순례길을 걷는다고 하면 누가 손뼉 치며 환영해주고 누가 물을 갖다 주면서 배려해주겠는가. 종교가 사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순례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선 순례길을 걷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순례를 하고 있다.  


* 순례길 브이로그 보기 : 여기는 설악산이 아니고 순례길 입니다

https://youtu.be/PYq6i3O7X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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