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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는 단어엔 굉장한 주관이 담겨있다. 진짜 짜장면, 진짜 소고기 등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먹고 싶나 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여러 말에 ‘진짜'를 붙여서 기존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어쩌면 그 변형된 단어 자체가 무언가 특별해 보여서 그렇게 단어를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면서 ‘진짜 순례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순례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걷고 싶어서다. 나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튜브나 책으로 꽤 소개돼 있다. 순례길을 시작한 이유, 길에서 생긴 일, 길에서 만난 사람들 등 여러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순례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에게도 큰 설렘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질문이 용솟음쳤다. 그들은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의 차이를 알까.
제주 올레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방해서 관광화 시킨 길이지만 제주 올레 순례길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주 올레길엔 종교적 의미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순례는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백 프로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여정이 곧 순례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로 인하여 생겨났다. 성 야고보는 예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서 순교했지만 수백 년이 흐른 8세기경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유해가 정말로 성 야고보의 유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유럽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야고보 사도 무덤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 야고보의 일생은 어땠는지, 왜 하느님도 아닌 사람 앞에서 기도 하는지, 그 당시 순례자들은 어떤 목적과 생각으로 길을 나섰는지 등 더 깊은 이유를 알고 길을 걷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어제 만난 한국 아저씨들은 순례길을 마치 스포츠 마냥 걷고 있었다. 자기들은 한국에서 해파랑길, 제주 올레길 등 온갖 길이란 길은 다 수료(?)하고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다고 자랑했다. 게다가 하루에 50킬로 미터 이상씩 걸어가면서 마치 군인이 앞으로 전진하듯이 순례길을 정복하고 있었다. 어떤 한국 아주머니는 애초에 순례길을 스포츠로 인식하고 걷는 사람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기도하는 사람, 마을 성당에서 미사를 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건 순례가 아니다. 절대 순례라고 말할 수 없다.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순례자들에게 발급해주는 종이를, 순례 수료증이 아니고 순례 증명서라고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적어도 순례길을 걸으려면 종교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어느 정도 역사와 의미를 인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아무 지식과 생각 없이 순례를 나섰지만 길 위에서 종교적 체험을 함으로써 얻는 가치를 뜻한다. 가톨릭에서는 이걸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말한다. 나도 모르게 성령에 의해서 무언가를 얻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순례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진짜 순례자로 어떻게 걸으면 좋을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순례길을 걷기 전에 몇 가지 다짐을 만들어서 매일 지키고자 했다.
첫째, 매일 아침에 묵주기도를 바치자. 묵주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기와 같은 영적 도구다.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에겐 무기가 없이 걷는다면 쉽게 다치기 마련이다. 아픔은 육체적인 상처에서도 오지만 영적으로, 마음에서 오는 상처에서도 온다.
둘째, 매일 미사를 드리자. 마을에는 꼭 성당이 있다. 불과 몇 백 년 전까지 가톨릭 신앙은 유럽 사회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마을을 만들 때는 성당과 시청을 짓고 그 주변으로 마을을 구성한다. 순례길에서 지나치게 되거나 잠을 자게 되는 마을엔 성당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순례자 미사가 봉헌된다. 순례자 미사는 신부님과 마을 사람들이 하룻밤만 지내다가 떠나는 순례자들에게 힘껏 영적인 힘을 불어넣어 준다.
셋째, 매일 일기를 쓰자. 순간순간은 곧 과거가 되어버린다. 지금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이 순간은 영원히 사라지기 마련이다. 나는 순례길에서 보낸 시간을 최대한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진짜 순례길을 걷고 있다. 나는 진짜 순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다분히 내 생각과 주장으로 꾸며진 이야기일지라도 상관없다.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주관적인 의견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진짜 순례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하느님이라고 믿는 절대자가 나를 붙들어주고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나는 그 덕에 길에서 마주하는 갖은 어려움과 유혹을 거뜬히 이겨내고 있다. 시간의 영역을 넘어 천 년 전 순례자와 함께 걷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다가가고 있는지, 뭐 때문에 스스로 사서 고생하고 있는지 등 그 이유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